내 서고에 애지중지 아끼는 두 권의 선집이 있다. 하나는 도널드 프레지오시(Donald Preziosi)가 엮은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이고, 다른 하나는 로버트 S. 넬슨(Robert S. Nelson)과 리처드 시프(Richard Shiff)가 엮은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이다. 둘 다 미진사에서 번역한 작품이다. 미술사와 비평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개념, 이론, 사례들을 망라한 선집이라 한창 학구열이 불탔을 시기에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그 묵직함 탓에 진득하니 읽는 훈련에도 도움이 되었고…). 여기서 읽었던 특정한 용어나 사례들은 나중에 특정한 주제에 대해 뭔가 쓰거나 말하려고 할 때 자주 소환되곤 했다.
이런 선집의 한국미술 버전도 나와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나왔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다룬 중요한 에세이, 기사, 비평문, 전시 서문, 칼럼 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 앞선 선집과는 두 가지 지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시대순 배치다.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한 시대를 정의한 후, 그 안에서 다시 소주제를 나누어 그 주제에 부합하는 글들을 엮었다. 단순히 한국 근현대 미술의 주제들을 보는 것이 아닌, 시대상을 먼저 상정해 놓고 거기 귀속된 주제를 본다는 의도다. 미술사적 관점이 글의 선정에 있어서 선험적 구속력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한편으로 굵직한 맥락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그 자체로는 뛰어난 문장들이 지면에서 탈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엮은이들이 ‘지은이’ 감투를 썼다. 물론 엮은이들이 전체 서문, 시대별 서문, 원고별 서문을 쓰기는 했다. 이 서문을 통해 주제 및 시대상에 대한 개관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래도 그 서문들의 분량은 책 전체 텍스트의 30%가 채 안 될 것이다. 이 서문들을 쓴 대가로 ‘지은이’ 감투를 써도 되는지 의문이다. 이 책의 본질은 서문이 아니라 결국 추려진 원고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엮은이들은 말 그대로 편저자들이 되어야 할 텐데, 왜 지은이일까? 이들이 지은이라면 원고들의 ‘진짜’ 저자들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결국, 엮은이들이 저자가 되려면, 이 책에서 서문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지은이의 위상을 허용치 않기로 했다. 그 정도로 깊이 있고 참신한 의제 설정과 탁월한 해제는 없었다.

비평문으로 들여다본 한국 근현대 미술사라는 시도는 참신하지만, 내리는 결론은 참신하지 않다. 그간 이 시공간을 다룬 다른 저작들(예컨대 이런 책, 혹은 이런 책)과 거의 흡사한 결론에 당도한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는 정체성 투쟁의 장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내부적 의지와 에너지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어떤 민족이 외부의 압력을 수용 및 변형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혼돈과 갈등이 미술사의 기저를 추동해 왔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미술이 일상적 삶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면서 동시대 대중들과 소통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술 자체의 형식적 가치를 극한까지 추구하면서 밀어붙여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간 여러 저술이 입을 모아 지적한 이 부분, 즉, 외세와 내부, 현실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의 긴장은 앞으로도 외형만 조금씩 바꿔 언제든 다시 돌아올 논쟁적 주제다.
10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글들을 단숨에(물론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비유적 표현이다) 읽다 보니 논조의 변화가 감지되어 흥미롭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저자의 강한 신념이 담긴 날카로운 문장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진영 간의 극명한 대치가 본격화되고, 고등교육을 마친 소위 전문적 식자들이 담론에 적극 뛰어들고,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같이 자유로운 해석에 내맡기는 사조들이 본격 유입되면서 날카로운 주장이 유보되는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답이 없는 시대의 담론은 이런 모습을 띤다.
물론 나는 그 이전 시대의 글에서 더 많은 흥미를 느끼고, 또 그런 날카로운 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며, 아직 제 할 일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가령 1915년에 나온 안확의 「조선의 미술」이라는 논평은 탁월한 안목과 날카로운 논리로 중무장했다(55-66p). 특히 유교가 미술과 같은 기예를 천시하므로 발전이 없었다는 지적은 정확하고, 오늘날까지도 새겨볼 만한 진리를 담고 있다. 서양화의 혁신은 단순히 재료와 기법의 혁신일뿐만 아니라 주제의 혁신이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춘원생의 글은 또 어떠한가(82-86p). 심지어 그는 화가들의 발전을 바라는 진심 어린 마음에서 술과 색을 멀리하라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고 있는데, 이 대목을 보면 도대체 비평의 역할과 범위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정답이 없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너무 많이 참견질하는 것은 아닌지 늘상 경계하곤 한다. 하지만 그 자아 성찰로 인해 응당 해야 할 말조차도 애써 삼가거나 에두르느라 정작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말잔치만 늘어놓게 된다면 그 또한 한낱 종이 낭비에 그치게 될 수 있다.
윤우인의 사례도 살펴보자(259-263p). 그는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을 두고 딱히 근거도 없이 이 작가 저 작가의 출품작에 대해 아주 재빠르고도 명쾌하게 평가하고 넘어간다. 오늘날에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그 어느 지면에도 실릴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평론이다. 가끔은 이런 평론도 필요하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은 맛있다고, 맛없는 음식은 맛없다고 단박에 외치면서 왜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그토록 탄탄한 논리와 (대가들로 점철된) 선행연구가 필요할까? 왜 영화에는 한줄평과 별점이 있는데, 미술계에는 없을까? 하나의 작품에서 우주와도 같은 사유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미술계 소수 지식 엘리트들이 구축해 놓은 업계의 진입장벽이 아닐까? 담론의 품질만 강조하다 보면 영원히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고 사라지는 작가들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영원한 무관심과 한 줄의 혹평 중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끝으로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비평으로 보는 현대 한국미술’에서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그야말로 언제나 논쟁적이었고, 정답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내포하는 주제일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구본웅은 일제에 부역했고, 단순한 부역을 넘어 동료 선후배 예술가들에게 예술을 무기로 제국을 위해 참전할 것을 앞장서 종용했다. 이쾌대는 정치적 목적에 부역하는 예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전후 격동기에 결국 월북해야 했고, 거기서 누구보다 정치적 목적에 충실히 부역했다. 그들에게 나름의 이유가, 과정이, 계기가 있다. 누군가 설령 최악의 선택을 했을지언정 그 한 부분이 삶과 예술 전체에 대한 총체적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사안을 가능한 한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
민중미술의 좌장이었던 오윤은 혁명의 불꽃이 한창이었던 80년대 중반에 이미 그 열기에서 한 발짝 빗겨선 사유에 도달했다. 그는 비참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려 했던 리얼리즘조차도 현실 세계의 복잡한 맥락과 인과관계들을 거칠게 축소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박찬경은 다원화된 스펙터클의 시대에 ‘정치의 표현’보다 ‘표현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1992년에 이미 간파했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예시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가 앞으로도 비평의 핵심 논제가 된다면, 오윤의 시선과 박찬경의 방법론에 주목할만하다. 어차피 그 무엇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으니, 이제는 사안을 복잡하게 하면서도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그 무언가,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찰싹 들러붙으면서도 그 네트워크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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