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eu à l’esthétique
신비를 걷어낸 자리에서,
특정한 대상에서 미를 느끼는 메커니즘은 우리 뇌에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사회문화적 과정을 통해 어떤 대상이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관념을 학습하고, 그런 공통의 관념을 부지불식간에 내재화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적 대상에 대한 주의와 반응은 뇌의 지시를 따른다. 그런데 누군가의 뇌에서 아름다움과 추의 정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외부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많은 경우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 스스로도 잘 모른다. 주체는 보고 싶은 무언가를 계속 보려 하고, 거기서 모종의 쾌를 느낀다. 그 마음이 누군가와 통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본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만약 그 이유를 탁월하게 잘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을 통해 심지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할 수도 있다면 그 사람은 미학을, 아니면 비평이라도 해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특출나게 그런 일을 잘했던 몇몇 사람들이 미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만들었고, 그 규범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다수는 그 미학의 기본 원리들을 신봉한다. 아니면 의심하면서도 계속 인용한다. 저자 장-마리 셰퍼(Jean-Marie Schaeffer)는 바로 그 미학에 작별을 고한다. 이 해체는 완전한 파멸이 아닌, 대안의 모색에 가깝다.
저자가 작별을 고하고자 하는 미학은 철학적 미학이다.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과 칸트(Immanuel Kant)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로 대표되는 그 미학이다. 이 미학은 예술의 본성을 다루면서,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리라 기대한다. 어떤 대상이 놓인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활동 총체를 다루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것과 대비되는 유토피아 어딘가에 미의 관념을 슬며시 놓아둔다. 태양이 하나이듯, 이상향도 여럿일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무수한 개인들의 무수한 감상은 둔탁하게 뭉뚱그려졌다.
미학의 초기 대가들도 경험과 감상이 주관적 영토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탁월한 혜안과 역사철학적 논리를 버무려 미학을 떠받치는 무수한 오브제들 가운데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두둥실 떠오르리라고 넌지시 암시했고, 미학의 선구자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인용하는 가운데 철학적 미학의 핵심 원리들은 점차 견실한 토대가 되었다. 토대가 공고해질수록 그것이 먹고살 만한 서구-백인-남성의 편협한 안목이라는 점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경험은 주관적이지만,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모순이 자아내는 긴장감이 심리적 매료를 불러일으키면서 미학은 철학의 핵심 분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미에서 진리를 추출하기 위한 기준의 설정과 범주화가 진행되었고, 범주화된 관념은 이후로 전개되는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에 실효적으로 작동하는 칸막이가 되었다. 하지만 현상으로 담론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담론에 현상들을 끼워 맞출 수는 없다(22p). 서구 근대 미학의 실패는 여기서 기인한다. 미적 성찰이란 미적 사실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어떤 오브제에 대한 판단 및 평가의 기준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0년 동안 미학을 떠받쳐 왔던 주요 전제 중 하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이었다. 한갓 물질의 세계를 떠나 고고한 정신의 영역이 있으며, 철학자의 날카로운 지성이 그 정신의 신비를 벗겨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는 신이 죽은 후 남겨둔 빈자리에 그렇게 야심만만한 발자국을 남기려 했다. 허나 과학적 증거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바는, 물질의 네트워크를 벗어난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인간 존재가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과 호환될 수밖에 없다(31p). 미적 주의력과 반응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그 프로그램 위에 사회문화적 학습이 군집화된 양상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적 미학은 출발부터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 셈이다. 뇌과학적 인식의 메커니즘에서 특수하게 고상하고 미적인 인식을 다루는 별도의 회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하리라고 상정하다 보니 개념 대 지각, 합리 대 실증, 정신 대 감각 같은 이원론만 켜켜이 에둘러졌다(65p). 그러면서 눈에 잘 띄고, 단박에 설명하기 좋고, 유형자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한 시각 예술에만 논의와 이론화가 집중되었다. 물론 이 풍부한 논의가 이 장르에 엄청난 신비화를 가져왔고, 이 신비화의 유산은 벤야민(Walter Benjamin) 사후 100여 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모든 철학적 미학이 문제는 아니다. 일반적 대상이나 고품격 예술 작품이나 각 대상의 인지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고, 모두 인지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인데, 이것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미학이 문제다. 또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는 미학이 문제다. 미적 경험이란 예술가의 창작 활동만큼이나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며, 대상의 유형이나 지위와 무관하게 진행되는데, 이것을 예술 작품에 대한 수용이나 감상쯤으로 여기게 되면서 미적 자율성이나 능동성이 담론의 영역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다(85p). 미적 행동에 관한 연구는 예술 작품의 수용 메커니즘 정도로 환원될 수 없다(87p).
미적 판단과 평가가 본령이라고 은연중에 암시하는 미학도 문제다. 미적 대상의 인식은 거의 자동적으로 미적 판단을 수반하지만, 미의 영역 전체가 미적 판단의 중요성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그 자체로 이미 주의력, 경험, 실천 등과 같은 다양한 기능과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고, 미적 판단은 그 가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105p). 누군가의 미적 경험을 다룬 아름다운 논리와 명쾌한 판단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미적 대상이 될 정도로 쾌를 줄 수 있지만, 그 판단은 누군가의 주관적 편향의 표현에 불과하고, 절대 보편적 진리의 자리를 꿰찰 수는 없다. 원론적으로 미적 판단을 담은 명제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없다. 그 판단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든,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든, 일단 담론의 장에 던져진 판단의 명제는 그 자체로 진리다. 미적 경험에 대한 하나의 “상태는 정신적 상태이고 명제를 진술하는 사람에게만 이 상태에의 접근이 허용되기 때문에, 이 명제는 그것의 진실이 전제로서 수용될 때만 기능할 수 있다(113p).”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취미 판단을 기각하거나 부정할 근거나 방법론이 없다. 그저 각자의 경험이 담긴 아름다운 명제들이 담론의 장에 많이 흘러나와 뒤섞이길 바랄 뿐이고, 그중 일부만 살아남을 뿐이다.
미적 판단은 윤리적·도덕적 가치 판단과는 별개다(118p). “미적 판단이 충족해야 하는 유일한 조건은 미적 주의력에 내속되는 감상을 표현하는 것(121p)”이다.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권리를 갖는다. 어떤 대상에 실제로는 공감하지 못하면서 규범적으로 바람직하고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타인 혹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런 거짓 판단이 만성화되면 어느 순간 진정한 자기 미적 경험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미적 경험이 주는 원초적 쾌를 영원히 망각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보다 불행한 일이 있을까? 그러니 불가피하게 규범적 판단을 내뱉는 순간에도 그것이 미적 판단에 속하는지, 부합하는지, 아니면 반하는지 구별해 내야 한다. 스스로 인지 체계의 정동을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어딘가에 그 임상적 기록을 써 내려가야 한다. 미적 판단이 대단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은 소통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슬픈 현실이 아니다. 그 숙명은 우주처럼 깊고 아득한 한 개인의 인지 체계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보여준다. 이처럼 다채로운 주관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켜켜이 쌓인 공동체가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열린 미학의 유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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