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언어의 게릴라를 모집합니다.
미술 분야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면 일단 덮어 놓고 장바구니에 넣어 둔다. 그간 비평이나 작가의 말 따위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가르쳐 주는 책은 몇 권 있었으나(예시: 1, 2, 3, 4), 전문적 학술논문에 온전히 초점을 맞춘 국내 저자의 책은 없었기에 이 책이 반가웠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미 여러 편의 논문을 출판한 나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논문의 구성, 글쓰기 특징, 연구방법론의 원리 등은 이미 아는 내용이라서 기초 복습 차원에서 한번 쓱 읽어봤다는 정도로만 의미를 발견했다. ‘미술디자인’을 제목부터 유난히 강조했기에 이 학문 분야에 특별히 접목될 수 있는 방법론이나 연구의 자세가 구체적으로 다뤄지리라 예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저자는 연구방법론 및 논문 쓰기 실무의 극히 기초적인 내용들을 주로 다루었는데, 아마 본인의 학문 분야에서 이것을 간과한 학생과 연구자를 너무 많이 목격해서 책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저자는 학부에서는 실기를, 대학원에서는 인문사회학을 전공한 인물로, 현재도 왕성하게 작품발표 및 교육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통섭적 배경을 지닌 인물답게 실기에만 온전히 치중하느라 논문을 소홀히 하는 후학들에게 많은 회의를 느꼈을 것이고, 그런 정서들이 실제로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드러나 있다. 석박사 학위논문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단계에 있는 미술디자인 전공자들에게는 확실히 유용한 내용이 많다. 하지만 인문사회 계통 논문을 세 편 이상 써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실용적으로 건질만한 부분이 별로 없어 보인다.

바른 글에 대한 저자의 신념만큼은 모든 학문 분야 연구자들이 눈여겨 볼만하다. 저자는 우리 말이 중국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치하를 거치며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에 개탄한다. 출처도 불분명한 일본식 글쓰기가 마치 고고한 학문적 글쓰기인 양 잘못 포장되어 정보 전달 기능도 약해지고 우리말이 지녔던 본디 아름다움도 훼손되었다고 강조한다. 일본식 표현이 교양과 전문성을 갖춘 문어체로 여겨지고 이것이 상스러운 구어체와 대비되는 것이라는 인식은 한참 잘못됐다고 말한다. 특히 멀쩡한 단어에 ‘~적(的)’, ‘~화(化)’, ‘~성(性)’ 등을 마구잡이로 붙여 의미를 불분명하게 하거나, ‘の’에 해당하는 ‘~의’를 남발하거나, 그밖에 ‘제(諸)’ ‘대(對)’ 따위를 붙여 정체불명의 짬뽕 언어를 만드는 것을 강하게 지적한다. 유식한 척 종종 쓰는 ‘상게서’, ‘전게서’, ‘졸저’ 따위도 일본어의 잔재라니 충격적인 진실이다. 이런 표현은 확실히 잘못되었다.
의식 있는 지식인이라면 올바른 한글 표현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고, 공동체의 규약인지라 나만 특정한 언어생활에 투신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언어가 공동체에서 매끄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식 단어와 표기로 점철된 문어체 표현을 이제 중단하겠다고 다짐하고 어떤 문서를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그 문서는 결재선을 거치면서 다시 문어체 문서로 바뀌게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실제로 내가 이 책을 읽기 불과 며칠 전, 모든 문서에 구어체를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다.) 문화 및 제도 전반에 걸쳐 조직 전체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문어체 종식이 가능할 텐데, 언어란 문화 구조 전반에 촘촘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인지라 그런 대대적인 변화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거의 세종대왕급의) 아주 강력하면서도 지혜로운 리더십이 솔선수범하면서 작동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고려하면 바른 언어 사용에 그렇게 많은 자원과 역량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
그 정도 급진적 혁신이 불가능하다면 각자 생활 속에서 작은 혁신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트인 사고를 지닌 지식인들이 바른 언어의 게릴라가 되어 지면 위에서 검열되지 않을법한 비좁은 공간, 어간, 여백, 문틈을 찾아 부비트랩처럼 바른 언어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다. 이런 작은 혁신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가랑비에 옷 젖듯 바른 언어의 지분이 커진다면 케케묵은 일본식 표현을 조금씩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일단 내 힘이 닿는 한에서만이라도 실천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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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값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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