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Huyghe: Liminal, Organized by LEEUM, In partnership with Bottega Veneta
혼종의 문턱에서,
감각 기관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는 말단의 인터페이스로서, 신체와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핵심 경로다. 인간은 고도의 지성을 통해 탁월한 추론과 의사결정 능력을 발휘하여 지구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지성을 가능케 한 것은 감각 기관을 통한 부단한 학습이다. 감각 기관 없는 신체는 입출력 장치 없는 슈퍼컴퓨터와 같다. 지구상의 모든 NVIDIA GPU를 초초초초고성능 CPU에 결속해 본들, 아니면 상온에서 통제 가능한 꿈의 슈우퍼-양자컴퓨팅을 구현한 들, 입출력 장치가 없다면 아무 것도 학습하지 못한다. 감각 기관 없는 뇌란 무한의 우주 공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두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아무런 외부 자극도 수용하지 못하고, 아무런 생존기술도 학습하지 못한 채, 아무런 의미 없는 재귀적 연산 작용만 반복하다가 영양소 공급이 끝나는 순간 썩어들어갈 것이다.
감각 기관 없는 신체의 무기력감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대형 영상 작업인 <리미널(Liminal)>에서부터 강조된다. 얼핏 완벽한 육체를 지닌 존재는 광망한 대지를 서성거리고, 더듬거리고, 엎어졌다가 돌아눕고, 이내 다시 일어서 위태롭게 경계의 끝자락에서 비틀거린다. 완벽한 육체와 대비되게 그 존재의 얼굴은 텅 빈 진공이다. 눈도, 코도, 입도 없이 싱크홀처럼 뻥 뚫린 얼굴은 감각 기관 없는 신체의 무기력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신체를 담은 작품 자체는 전시 공간에 배치된 센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주변 정보들을 빨아들여 이 작품의 서사적 흐름을 지속적으로 갱신한다. 공식적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전에 제작된 영상을 단순히 사후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실시간으로 재생산되는 영상이다. 제작과 송출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현재진행형의 작품이다. 작품은 실시간으로 학습해 스스로를 갱신해 나가는데, 정작 감각 기관과 주체성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으로 전제되는 인간의 형체는 주체적 작품 안에서 감각 기관을 거세당한 채 그저 존재하기에도 급급한 모양새다.

작금의 기술 문명은 단순 반복적 사무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 주리라는 유토피아를 소환하지만, 한편으로는 감각 기관을 상부 구조에서 통합해 고도의 추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능력마저 서서히 퇴화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더불어 고조시킨다. 기계가 감각과 추론을 모두 대신해 준다면, 당장은 편리하겠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이 무엇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이 의문에서 곧장 파생되는 실존적 위기감은 일종의 거세공포증에 가깝다. 내가 나의 감각 기관을 거세하고도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유사 감각 기관처럼 임무를 부여받은 어떤 공동체에서 나를 거세한다고 하더라도 이 공동체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지 않을까? 감각 기관 없는 육체는 목표 의식 없고 무기력해 보이기는 하나, 당장 생존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그 육체는 군살 하나 없이 완벽히 탄탄한 근육질이다. 이 매끄러운 육체는 그 완벽함을 매개로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신인류를 표상하며 거세공포증을 부추긴다.
감각 기관 거세의 첫 단계는 완벽한 탈각이 아니라 혼종이다. 감각 기관은 처음부터 기계적 촉수로 전환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기존 기관이 보조 장치와 결합되어 조력을 받는 수준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혼종적 상태에서 기계적 촉수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각종 조건에 부합하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 데이터가 상호 검증을 통해 그 무오성을 인정받는 순간 감각 기관의 기능을 순차적으로 잠식해 나간다. 이러한 혼종적 상태가 이 전시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임계점의 상황, 혹은 전이적 경계선이다.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어느덧 그 임계점의 목전에 와있다. 스마트워치를 차고 달리는 저 숱한 러닝크루 멤버들이 개인정보 활용 약관에 무심코 동의하는 순간, 혼종적 존재들을 향한 임계점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혼종의 시간이 도래하면 가장 먼저 대두되는 질문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휴먼 마스크(2014)>에서는 그 질문이 튀어나오자마자 곧장 뒤집힌다.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질문은 암암리에 인간에서 출발한 혼종적 존재의 정체성을 가리키지만, 이 질문을 엎어 ‘비인간과 인간’이라고 발화하는 순간 관심의 초점은 인간을 향해 돌진하는 미지의 존재들을 향한다. 이때 경우의 수는 더욱 복잡해진다. 인간에서 출발하는 질문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면 되므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표류했던 시행착오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비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사유의 지평이 닿지 못한다. 우리가 비인간이었던 시간은 역사의 문턱을 아득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 마리의 마카크원숭이가 등장한다. 지구상에서 위도가 가장 높은 곳에서 사는 그 마카크원숭이다. 그 녀석은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지역의 어느 식당에 홀로 남아 인간 소녀의 가면, 가발, 원피스를 뒤집어쓰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낸다. 술병을 나르고, 카운터를 지키고, 선반을 뒤적거리는 등 식당이 성업하던 당시 학습했던 행동들을 무심결에 반복하다가 무료함에 지쳐 멍하게 앉아 있기도 하고, 약간은 폭력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 녀석의 행동을 침착하게 관찰하노라면 원숭이가 인간화된 허울을 뒤집어쓴 것이 분명해지지만, 스쳐 지나가듯 얼핏 본다면 반대로 인간이 원숭이의 털가죽을 부분적으로 착용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은 이 녀석이 가발 머리카락을 가슴께로 끌어와 끝단을 쓰다듬는 듯한 행동이었다. 통상 이런 행동은 인간 여성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원치 않는 주목을 받으며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거나, 아니면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것을 잠시 잊고 싶을 때 취한다. 신체 기관 일부를 만지면서 감각을 깨우고 현재 살아 있음을 재확인하는 무의식적 행동인 것이다. 가련하게 식당에 홀로 버려진 마카크원숭이는 자기 머리도 아니면서, 즉 두피의 감각 세포와 연결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왜 가발의 머릿결을 매만졌을까? 이 행동은 영장류의 공통 습성인가? 비인간이 혼종 인간이 되어 가장 인간다운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당혹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논의도 시작하지 못한 우리에게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라는 질문은 너무 갑작스럽다. 예술의 순기능 중 하나는 정치인이나 과학자들이 입조차 떼지 못한 질문에 대해 억지로라도 사유를 강제한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완성되지 않고 지속 생성되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해 예술 자체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앞서 언급한 <리미널>이 실시간으로 영상을 생성하면서 재생하듯, <U움벨트-안리>는 <암세포 변환기>의 세포분열 데이터와 외부 조건을 학습해 실시간 이미지를 생성한다. 또 사막에서 발견된 해골을 둘러싼 기계장치의 의례를 무인 촬영 장비가 촬영해 실시간으로 편집하고 무한정 재생하기도 한다(<카마타>). 이처럼 서사성이 확정되지 않고 실시간 무작위성으로 변모하는 속성에 대해 위그(Pierre Huyghe)는 선형성의 회피이자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라고 정의했다.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식으로 말한다면 물리적 매체의 한계를 넘나들게 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을 예술가의 제작 전략 차원에서가 아니라, 작품에 내재하는 고유 속성 차원으로 끼워 넣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그가 통제 불가능한 생명체들을 미술관으로 잔뜩 끌고 들어와 자기 작품의 일부인 양 전유하는 전략도 오토마티즘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주드람 4>,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암세포 변환기>, <주기적 딜레마>). 의도치 않게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린 생명체는 큰 틀에서 작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지만, 구체적 실천에서는 철저히 우발성을 따른다. 생명체는 계속 움직이며 매체를 넘나드는 오토마티즘을 실행한다. 그것이 본래 품은 의도나 욕망과는 별개로.




이 무작위 실시간 생성이라는 전략은 디지털 예술 환경에서 예술이 아우라의 본령을 사수하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읽을 수도 있다. 90년 전에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예언했듯 기술복제시대에 예술 작품은 특정한 원본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잃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작품이 애초에 디지털 미디어로 제작되었다면, 그것을 붙여넣기 한 작품의 사본은 원본과 같은 품질을 보장받는다. 위그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하면서 변모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원본성 개념을 제안한다.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생성되고 있는 영상은 어제 여기서 상영된 것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언가이고, ‘지금 여기’에 적용된 감각 기관으로 획득된 정보를 토대로 또 다른 장소에서 동시 재생하지 않는 한 완벽한 유일무이의 원본이다. 이 실시간 생성-송출 메커니즘은 어제 전시장을 찾았던 관객이 오늘, 그리고 내일 다시 전시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지금 여기’에만 원본이 있고, 여기에서만 아우라적 체험이 가능하다. 이것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 아우라의 마지막 잔여물을 붙들어 매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무작위 실시간 생성에는 맹점이 있다. 이 작품에 진짜 감각 기관이 존재하는지, 감각 정보가 왜곡 없이 서버로 전송되는지, 서버에서 감각 정보를 적절하게 처리하는지, 지금 보이는 화면이 실시간 알고리즘에 의해 처리된 결과물이 맞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의심의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젖히면, 작가가 스스로 센서를 달고,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정보의 흐름을 투명하게 모니터링하지 않는 이상 작가 스스로도 이 무작위 실시간 생성 메커니즘을 100% 신뢰할 수 없다. 정확한 기술적 메커니즘은 작가보다는 작가가 관련 기술개발을 위임한 기술 전문가가 더 잘 알 것이다(예컨대 <U움벨트>를 함께 개발한 교토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유키야스 카미타니(Yukiyasu Kamitani) 교수 같은 사람). 이처럼 실시간 생성형 작품에는 몇 가지 속임수의 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작가에게 속을 수 있고, 작가는 기술 전문가에게 속을 수 있고, 최종 국면에서 기술 전문가는 정보통신 시스템 자체에 속을 수 있다(정보통신 시스템 내부에서 SW와 HW가 서로를 속이는 국면은 일단 없다고 전제한다면).

우리가 지금 속임수를 보고 있다면, 우리를 속이고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이러한 의심의 근원에는 블랙박스의 문제가 있다. 챗GPT가 어디서 긁어모은 정보를 어떻게 재조합해 그럴싸하게 씨불이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독해의 현실적 제약조건에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듯, 고도의 기술적 시스템 안에서 구체적인 추론 및 의사결정의 메커니즘은 블랙박스의 외부자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블랙박스의 창안자조차도 그 메커니즘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블랙박스의 문제를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갤러리에서 새삼 재인하게 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리움미술관의 장소성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그 창업주 ‘리씨 가문’을 경유로 한 글로벌 기업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기업은 감각 기관의 정보화, 다시 말해 인간에서 출발하는 혼종적 존재로의 유토피아를 가장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이 지점에서 전시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글로벌 기업은 창업주의 이름을 딴 미술관에 최첨단 신기술로 무장한 미학적 대리인을 내보내 감각 기관이 거세/대체된 혼종적 신인류에 관한 유토피아를 설파하는가, 아니면 디스토피아적 경고장을 날리는가? 논점은 분명하지 않다. 작품에 대한 우리의 미학적 평가마저 챗GPT에게 유보하지 않는 한, 이 가능성의 장은 두 갈래 길로 열려 있다. 전시 외적으로 기술, 산업, 문화 생태계를 둘러본다면 아직은 어느 한 길로의 불가역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령 감각 기관의 퇴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인류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그 생물학적 증거가 <주기적 딜레마(2017)>에 있다. 견고한 수조가 주기적으로 껌뻑거리며 테트라 물고기의 평화로운 유영을 보여주다가 이내 감질나게 감춘다. 차갑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억겁의 세월 동안 대를 이어온 녀석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구에까지 영양소를 공급할 정도로 사치스럽지 않다. 눈이 없어도 알아서 다 찾아 먹고 짝도 만나 번식한다. 태양이 폭발하기 전까지, 우리도 어떤 모습으로든 감각 기관을 유지하거나 혹은 대체하며 인류의 궤적을 이어갈 것이다. 다만, 테트라 물고기의 적응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감각 기관의 확장이 문득 통제 영역을 벗어나 신체의 본령으로 허겁지겁 회귀해야 하는 날, 우리가 이들처럼 잘 해내리라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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