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플레이 내한공연 – COLDPLAY: MUSIC of the SPHERES, World Tour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

LIVE NATION PRESENTS, COLDPLAY: MUSIC OF THE SPHERES DELIVERED BY DHL (25.4.16.)

음악의 승리, 국민성의 승리

콜드플레이(Coldplay)가 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나도 그 현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이 다시 이 작은 시장을 찾아준 것은, 그리고 횟수 추가를 거듭해 자그마치 6회나 공연 날짜를 잡아준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고, 백번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이 대행사 하나 잘못 만나 상당히 퇴색되어 버렸다.

고양종합운동장에 도착해 보니 설렘 가득한 인파로 인산인해인데 동선 안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기장 외곽에 현수막을 군데군데 걸어 놨으나 8년 전 현대카드가 보여줬던 친절한 인터페이스에 비하면 엄청난 퇴보였다. 조끼 입은 안내원들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관객의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경기장을 휘감았는데, 이 인파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도무지 알 길 없었다. 관객들이 서로서로 물어물어 줄을 서는 형국이었다.

나도 물어물어 스탠딩 대기 구역까지 갔다. 번호 구간별로 엄청난 인파가 잔디밭에 모여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식 화장실이 외곽을 둘러쳤는데, 여자 화장실이 빼곡한 데 반해 남자 화장실은 2개 사로만 확보된 상태였다. 나의 유구한 공연 역사에서 남자 화장실 대기 줄이 여자보다 더 긴 것을 목격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간 공연장 화장실에서 겪은 여성들의 설움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조치였다. 문제는 입장 시간이었다. 입장 시간인 다섯 시에 맞춰 대기 선상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입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흘러 6시가 되었고, 예정대로 엘리야나(Elyanna)의 오프닝 공연이 시작되었다. 음악과 함성이 공연장 밖으로 울려 퍼졌지만, 우리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남의 집 잔치인 양 귀동냥만 했다.

시간은 그 후로도 속절없이 흘러 이제는 두 번째 오프닝 아티스트인 트와이스(TWICE)가 무대에 올랐다. 그 무렵 앞번호가 서서히 입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해 이제 조만간 우리 18,000번째 후순위 관객들도 입장할 수 있으려나 기대되던 순간, 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줄과 상관없이 좌측으로 휩쓸리더니 어느덧 번호 순서가 무색하게 좁은 진입 게이트 쪽으로 엄청난 인파가 한꺼번에 몰렸다. 순차적인 입장 통제 시스템이 와해되고 돌연 ‘월드워Z’가 시작된 것이다.

아마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너무 적은 인원만 배치한 모양이다. 줄을 서 있을 때도 줄 사이를 오가는 안내 요원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줄을 표시해주는 작은 노끈 하나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입장 게이트를 지키는 인원도 너무 적었다. 그 적은 인원으로 출입 통제를 하려다 보니 공연 시간을 맞추지 못했고, 결국 안내 체계가 무너진 것이다. 맨 앞번호야 통제에 따라 제 순서에 들어갔겠지만, 그 뒤 어설픈 앞번호들은 뒷번호와 섞이는 바람에 애써 확보한 번호가 무력화되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크게 뒤엉키지 않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기획사가 잘 통제한 결과가 아니라 국민성의 승리다. (외국인도 많았으니 세계시민의식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트와이스 공연의 앞부분 세 곡 정도를 잘라먹고 나서야 비로소 스탠딩 구역에 입장할 수 있었다. 나야 트와이스 공연에 그렇게까지 크게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K-POP 씬에서 A급 아티스트에 속하는 그룹인데 이렇게 휑한 공연장에 서게 하다니 출연자에 대한 예의는 분명 아니었다. 이 구역에도 통제 인력이 너무 적다는 것을 들어서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무대와 맞닿은 메인 바리게이트 쪽에만 경호 인력을 집중 배치하고, 그 뒷부분은 아예 자유방임주의 모델을 택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사전에 통제하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던 대포 카메라와 셀카봉이 공연 내내 난무하는 것은 당연했다.

불만은 잠시 접어두자. 공연 자체는 최고였으니까. 라이브 내공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느낌이었고, 특히 프론트맨 크리스 마틴(Chris Martin)은 발성 자체가 8년 전에 비해 더욱 성장한 듯했다. 심지어 더 잘생겨진 것 같다…. 지천명을 앞둔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 무대에서 뛰어논 시간의 축적이 이런 성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니 역시 ‘1만 시간의 법칙’은 분명 존재하는 모양이다.

콜드플레이가 최근 꾸준히 밀고 있는 범우주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관객석 중간중간 두둥실 떠 있는 귀여운 행성들이 인상적이었고, 손목LED밴드 외에도 얄궂은 종이 안경을 추가로 지급해서 공연장의 조명들을 마치 일렁이는 머나먼 은하계 별들처럼 보이게 만든 시각적 요소도 신선했다. ‘Human Heart’ 공연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귀여운 인형극 연출은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8년 사이에 새로운 레퍼토리들이 추가되었지만, 기존 곡들을 공연하는 방식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메인무대 맞은편에 섬처럼 떨어진 별도의 무대를 두어 어쿠스틱한 느낌을 주면서 뒷자리 관객을 배려하는 시간도 예전과 비슷한 형태였다. ‘A Sky Full of Stars’는 중간에 잠깐 쉬어가는 구성이 예전과 같았는데, 내가 가장 광분한 시간이었다는 점도 예전과 같았다.

이번 공연에서 보강된 요소 중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부분은 관객과의 상호작용이었다. ‘Up&Up’ 시간에 가장 인상적인 팻말을 들고 있는 관객 한 명을 무대 위로 불러 피아노를 치며 즉흥적으로 협연하는 장면이 있었다. 중간중간 현재 상황과 그 관객의 인상을 뒤섞어 가사를 바꿔가며 불렀는데, 어느 정도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겠지만 그래도 재치있었다. 예상치 못한 감동에 거의 울먹거리려고 하는 그 관객의 진정성에도 공감이 갔다. 그 친구는 노래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가사도 잘 숙지하고 있었고 자기가 치고 들어갈 만한 대목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크리스를 지나치게 더듬는 장면에서는 다소 위태로웠지만, 평생의 추억거리가 될 테니 크리스도 아마 너그럽게 이해했으리라.

관객과의 또 다른 상호작용은, 무대 바로 앞에 서 있는 가드를 즉흥적으로 무대 위로 올려 외계인 가면을 씌우고 춤을 추게 했던 장면이었다. 그는 마치 예상한 듯 춤을 너무 잘 추어 각본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본이면 어떠랴, 재미 있었으면 됐지.

공연을 6회차까지 늘리면서 이번에는 8년 전과 같은 역사적인 매진 대란이 없었다. 나는 크게 앞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고 중간쯤에 여유롭게 섰는데, 걱정과 달리 밀집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공연이 시작되어도 흥분하지 않고 다들 제 자리를 지켰고, 충분한 개인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관객들도 아티스트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 그 덕에 쾌적한 공연이었다. 다만 떼창의 현장감은 다소 떨어졌다.

감동을 안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안내 인원의 부족에 따라 그 감동은 순식간에 퇴색되었다. 공연장 밖으로 나서는 데만 족히 30분 이상은 걸린 듯했다. 누군가 환자가 발생했다고 외치기는 했으나 빠르게 수습되었고 큰 사고는 없었다. 안내 인원들은 저 먼 좌석 구역에 군데군데 서서 기계적으로 주차봉만 휘적거렸는데, 현장에 배치된 소방관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흔해 빠진 확성기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손나팔을 만들어 연신 천천히 가라고 외치는 소방관의 목소리가 처연했다. 관객들은 자유방임의 분위기 속에 다들 묵묵히 꼼지락거리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렇게 공연장 밖으로 나서니 어느덧 감동이 퇴색되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공연장 밖 사거리까지 인파로 가득해 횡단보도를 지척에 두고도 꼼짝없이 서서 대기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누군가 뒤에서 확 밀면 도로까지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리 국민성은 그 정도로 저열하지 않았다. 이 정도 인파가 동시에 빠져나올 것이 예상되었다면, 횡단보도에서 일시적으로 차량 통행을 통제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기획사의 역량은 형편없었지만, 음악의 힘은 위대했고, 국민성은 더 위대했다. 그 덕에 아무런 사고도 없이 공연장 밖을 무사히 빠져나와 이렇게 아무도 정독하지 않을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부디 공연 마지막 날까지 아무런 사고도 없기를, 그래서 콜드플레이가 8년 후에도 다시 부푼 기대를 안고 이 작은 나라를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때에는 아마 티셔츠 한 벌이 12만원 정도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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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플레이 내한공연 – COLDPLAY: MUSIC of the SPHERES, World Tour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 대한 답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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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 저도 그날 갔었는데, 스탠딩석이셨나봐요~! 저도 현장 진행 엉망이라 생각했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었군요. ㅎㅎ 그래도 공연은 최고….글들 가끔 들러서 잘 보고 있습니다 ㅎㅎ 대단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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