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표면만 생각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다. 모든 물질과 현상에는 이면이 있다. 비 내리는 풍경에 도취하다가도 빗물받이와 우수관로의 청소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버스를 타다가도 준공영제의 성과와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가꾸다가도 장내 미생물의 생태계를 생각해야 한다. 다정한 눈 맞춤과 대화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대기에 흐르는 껄끄러운 기운을 감지해야 한다. 시시각각 오감을 덮쳐오는 표면만 빨아들이며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세상이지만,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주체가 되려면 이면을 보려는 첨예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와 세상의 이면을 보려는 어떠한 노력이나 사유 없이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로서 온전히 서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근본 없는 자아도취이거나 무언가에 세뇌된 상태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점에서 ‘감옥’만 한 주제가 없다. 99%의 선량한 시민들은 감옥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거의 없다. 흉악범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 연예인이 사고 칠 때, 범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수갑과 철창의 피상적 이미지가 잠시 뇌리를 스쳤다가 이내 휘발된다. 대체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한다. 경찰서와 변호사는 멀리할수록 좋다. 그리고 대다수는 실제로 그렇게 멀리하고 평생 살아간다.
그렇게 평생 법무부와 아무런 인연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더라도 행운에 가깝다. 그런 사람이 통계적으로 절대다수이고, 내가 그 절대다수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행운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가상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자명한 것이 없다고 믿는다. 내가 오늘날 범죄자도, 피해자도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거나 당위적인 현실이 아니다. 몇 가지 행운이 겹쳐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뿐이고, 반대로 말해 여기에 몇 가지 불운을 끼얹으면 언제든 범죄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교도소에 관한 교정학자 이백철 교수의 대담집 시리즈이다. 교도소의 역사, 현실, 정책적 제언을 담은 1권에서는 철학박사가 질문하고 이백철 교수가 답했다. 교도소의 실상으로 더 깊게 들어가는 2권에서는 이백철 교수가 묻고 사형수가 답했다. 1권을 쓸 당시 2권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1권에는 1권이라고 쓰여 있지 않다. 1권이 나오고 나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아 2권이 나왔다. 나는 두 권을 연속으로 읽었지만, 1권만 있었다면 확실히 아쉽긴 했으리라. 교도소의 실상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고, 개별적 질문들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훑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대담집이 아닌 단행본을 쓰시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저자가 교정연구나 현장 자원봉사를 오래한 전문가지만, 실제 본인이 갇혀본 적은 없었으므로 더 내밀한 이야기까지 들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2권에 이르러서야 익명의 사형수 입을 빌려 교도소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간다. 종교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나 저자와 코드가 아주 잘 맞는 익명의 사형수는 저자의 유도하는 질문에 대해 아주 정확히 유도된 답변을 내놓는다.
두 권의 주제는 반복된다: 오늘날 우리 교정제도는 자유형 중심의 처벌에만 방점이 찍혀 있다. 실질적 교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범죄자가 교도소에서 범죄 실무를 배우거나, 범법 의식을 함양하여 더욱 강력하고 상습적인 범죄자가 되어 재범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교정교화를 이루려면 인간적인 처우와 함께 당국이 종교적, 윤리적, 인문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데, 그런 전문성을 갖춘 교정 인력 및 시스템을 투입할 자원이 없다. 그런 자원을 승인해줄 사회적 여론이나 정치적 관심은 더더욱 없다. 대다수 국민은 사형제를 비롯한 엄벌주의와 열등처우의 원칙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엄벌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런 복잡한 이유까지 곱씹을 여유가 없다. 나는 선량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므로, 악인들을 엄벌하고 철저히 격리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만이 나를 더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만 생각한다. 선정주의에 영합하는 언론도 엄벌주의의 한계와 교정교화의 중요성을 대중에 설파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이 켜켜이 쌓여 세상과 교도소는 더 큰 담을 쌓고 있다. 이 담이 더 높아지고, 세상과 교도소의 거리가 더 멀어지면, 교정교화의 이상은 말 그대로 영원한 유토피아의 세계에만 갇히게 될 것이고, 악이 악을 낳는 악순환도 반복될 것이다. 교도소와 세상의 간격을 좁히고, 인문학과 종교와 지역사회에 기반한 교정교화로의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이 주제에는 너무나 많은 딜레마가 얽혀 있다. 무엇보다 응보성과 사회복귀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죗값에 마땅한 벌은 주어야 하는데, 벌의 수위를 높이다 보면 이미 괴물이 되어버려 사회로 복귀시킬 수가 없다. 사회복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피해자와 세상이 기대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몽땅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주어야 할까? 일단 수용할 곳이 없다. 사형을 주자니 국제인권 규범에 어긋나므로 교역과 외교에 문제가 생긴다. 범죄 예방 효과도 의심스럽다. 사형의 문턱이 낮아지면, 사소한 범죄도 살인까지 이를 가능성이 커지므로 무고한 잠재적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격이 된다.
예방과 사후 처벌 중 무엇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나? 처벌 중심의 교정 및 법무행정은 범죄 예방에 들어갈 예산을 갉아 먹는다. 예방에 투자하자니 성과를 측정하기 어렵고 효과도 의심스럽다. 그러니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교도소는 어느 정도 수준의 시설을 제공해야 하나? 조금만 좋아지면 아까운 혈세로 범죄자 먹여 살린다고 난리다. 조금만 나빠지면 온갖 투서가 난무한다. 투서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열등처우의 원칙을 계속 유지하자니, 교도소는 점차 지옥이 되어가고, 음험한 마음은 더욱 악으로 치닫는다.
범죄를 용서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나, 법무행정에 피해자가 설 자리는 거의 없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회심했는지 피해자가 알 길이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접촉 자체가 위험하고, 또 다른 가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국가 권력기관이 징벌과 용서를 모두 떠안자니, 회심하지 않은 범죄자를 용서하는 꼴이 되기도 한다. 가해자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와 무관하게 가해자로서는 형기만 마치면 죗값을 모두 치렀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는 홀가분하게 두부를 먹는 셈이다.
범죄자 개인만을 계속 단죄해도 되는걸까?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열악한 환경이 범죄를 양산하지만, 그러한 환경에 놓인 모두가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악한 세상 속 악한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영향력의 출처를 판가름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공소장에는 오직 범죄자 혹은 범죄집단만이 기록될 뿐이다. 거시적으로,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유사 구조에서 범죄자는 계속 양산된다. 특정한 범죄자 개개인도 자신이 속했던 환경으로 돌아가면 다시 범죄의 굴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교정행정은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나 범죄자가 돌아간 사회 공동체에 관여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기관, 또는 더 큰 사회적 시스템의 책임이다. 교정 당국은 그 시스템에서 낙오된 개별적 잔여물들만을 사후 처리할 수 있을 따름인데, 늘 그렇듯 개별 원자보다는 시스템의 힘이 더 크다.
이상의 딜레마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위에서 요약해 정리했듯, 세상과 교도소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다. 수용자에게 인간적인 처우를 해주고, 변화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구체적 대안으로는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성찰과 종교적 교화,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소통이 있다. 이 해법이 열등처우의 원칙을 위배하고 큰 비용을 초래할지라도, 그 비용은 범죄자를 다시금 양산해 세상 속에 풀어 놓는 위험성에 비하면 감수할만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저자의 종교적 배경과 자원봉사 이력에서 비롯된 이상주의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음을 고려해야겠지만, 그 방향성 측면에서는 분명 공감하는 바가 있다. 어차피 언젠가 내보낼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변화시켜 내보내야 한다. 목표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교도소 밖에 나가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 발전된 가치 있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방에 꼼짝하지 않고 박혀 있어선 안 된다. 뭐라도 읽고, 생산하고, 생각하고, 나누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스스로 가치를 확인하고, 또 타자로부터 그 가치를 재확인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설, 통제, 프로그램 등 여러 측면에서 단계를 구분해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세상에서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을 성취의 경험을 체득해야 한다. 수년간 획일적으로 통제만 받다가 기간이 만료된 순간 변화된 세상에 갑자기 덩그러니 내던져지는 방식으로는 당연히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하나의 시설 내에서 여러 세부 공간이 마련되어야 하고, 나아가 시설 자체도 다양해야 한다. 거기서 제공하는 통제 방식과 프로그램도 세분화해야 한다. 범죄의 질과 성향에 맞추어 최초의 단계를 설정해 놓은 후 변화의 수준을 다면적으로 평가해 도약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퇴행이 관찰된다면 응당 지체 없는 강등도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사람이 하는 모든 평가는 속고 속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과학적 평가 체계가 개발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은 허울 많은 인간의 일을 치밀하고 객관적인 무언가로 포장하기 위한 행정용어가 아닌, 실제 과학적 장비와 도구의 도입을 의미한다. 개인의 심리, 범죄성향, 목표의식, 시민사회의식과 같은 내면 상태를 실측하는 뇌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전문가의 다면적 관찰평가와 병행 사용하는 것이다. 교정시설의 과학화보다 이쪽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한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하려면 우선 교정행정의 패러다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정행정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교도관은 박봉, 교대근무, 민원, 잡무, 격오지 배치 등에 신음하는 대표적 3D업종 공무원으로 손꼽힌다. 교도관의 정체성을 ‘범죄자들이 사고 치지 않게 지키는 사람’에서 ‘교정교화 전문가’로 바꿔 나가야 한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수 없겠지만, 점진적으로라도 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정당국이 먼저 자기 조직을 스스로 그런 존재로 규정해야 하고, 재정 당국 및 정치권과 일반 국민을 상대로도 적극 설득에 나서야 한다. 예산과 TO를 확보해야 한다. 시설과 프로그램 측면에서 과감한 선도사례를 하나 만들고, 거기서 교정교화된 우수한 사례들을 적극 홍보함으로써 교도소와 세상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바람직하고 더 안전한 방식이라는 인식을 퍼뜨려야 한다.
성(聖)과 속(俗)은 하나로 얽혀 있고, 빛과 그림자는 서로에 의지한다. 이면에 있는 무언가를 세상이 계속 잊고 있고, 늘상 단편적인 발상에만 머무른다고 해서 세상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밖에도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을 따름이다. 사회적 정체성을 만드는 첫걸음은 자기규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교정교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척박하더라도 작은 씨앗을 움 틔워 큰 열매로 키워가는 일은 먼 시계를 바라보며 현재의 틀 안에서 시작할 수 있다. 교정 당국이 꿈을 꿀 수 없다면, 어찌 재소자들이 꿈을 꿀 수 있을까. 하기사 우리는 교육 당국조차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으니 그날이 요원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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