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iannon Mason, Alistair Robinson, and Emma Coffield, Museum and Gallery Studies: The Basics
“문화유산과 전통이라는 용어는 종종 서로 치환되어 사용되면서, 암묵적으로 연속성을 본래부터 좋은 것으로 보는 보수적인 이상형을 만든다.”
81p
“모든 전시는 하나의 주장이다.”
276p
지금이 박물관 문턱을 낮출 적기다.
늘 하는 얘기지만, ‘한 권으로’, ‘하루 만에’, ‘단번에’ 등 표현이 제목에 들어가는 책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어느 분야든 일단 발을 조금만 더 깊게 들이고 나면 한 권의 책으로 전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개론서는 어디까지나 개론서일 뿐이므로 더 알기 원한다면 전문서로 넘어가야 한다. 박물관학 개론서를 표방하는 이 책도 마찬가지다. 알면 알수록 박물관/미술관을 둘러싼 문제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오늘날 박물관/미술관이 포괄하려는 양립된 가치의 스펙트럼 자체가 너무 넓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상대로 역사적·미학적 화두를 던질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들을 상대로 현장학습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 국가 상징물로서 해외 관광객들을 유치해야 하는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한다. 정립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제공해야 하는 동시에 역사적 흐름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대변해야 한다. 박물관은 거대 서사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투입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따라 관람자 개개인의 해석을 존중해야 한다(287p). 교육을 강조하다 보면 획일화된 규준을 주입할 우려가 있고, 비판적 사고를 확산하려 하면 사회통합의 기구로서 조직의 정체성을 의심받게 된다. 누군가는 지적인 도전을 원하고, 누군가는 관광지에서의 한철 인증샷을 기대한다.
이 모든 가치 충돌의 중심에 재원이 있다. 특정 개인이나 법인이 설립한 민영 기관은 설립자를 지나치게 신성시할 우려가 있다. 정부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공 기관은 국민 계몽 관점에서 획일적인 평가를 요구하거나 당대 정권의 입맛에 따라 기획이 좌우된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영리 기관은 기획의 알맹이를 채우기보다는 스타 예술가나 간판급 작품 하나만 전면에 내세운 채 티켓, 기념품샵, 카페로 수익을 뽑아내기에 급급하다. 여러 개인 및 법인 후원자에게 재원과 권한을 분산하여 위임하는 모델에서조차 특정 고액 후원자에 대한 신격화 및 과도한 입김이 문제가 된다. 특히, 특정인이 다량의 진귀한 컬렉션을 기부하는 경우, 그 기부의 가치에 대한 상찬이 도를 넘어 기부자에 관한 그간의 사회적 평가마저 모두 희석해 버릴 정도가 되어 버린다. 결국 기부자의 이름은 컬렉션과 함께 봉인되어 영원불멸의 기념비가 되고, 그것은 기부자가 가장 원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 어떤 콧대 높은 박물관/미술관도 재원과 기부자의 의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인 세 전문가도 어떤 방향이 바람직한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다분히 신미술사적 관점에서 사회적 맥락과 소수자 입장을 고려한 컬렉션과 기획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또 그것이 주류 기관들의 새로운 방향성으로 정착되어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관건은 늘 그러하듯 균형이다. 폭넓은 스펙트럼의 가치, 의도, 기대를 아울러 그 가운데 집중해야 할 기관의 전략적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하나의 기관이 전체를 포괄할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는 전문화와 세분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대’를 뜯어 별도의 국립기관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차 확산하고 있는데, 이 또한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사회적 요구 및 기대의 자장에서 전문화와 세분화를 추구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척박한 문화예술 정책 토양에서 지금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전문화는 이처럼 시대적 흐름의 분절이라는 단순한 차원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박물관/미술관의 전체적 파이가 더 커진다면 사회적 기대 및 역할의 세분화 차원에서 더 전문화된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근현대 미술을 다루는 기관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도 두 가치를 추구하는 양립된 모델을 상상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미술사의 정설을 따라 기획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비평적이고 사회참여적인 노선을 강조하는 기획에 적극 나선다면,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급변하는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는 전시 기관의 모델로서 실험해볼 만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은 1장에서 박물관/미술관의 역사적 흐름과 개념 및 역할을 다루고, 2장에서는 컬렉션의 중요성과 유형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관람객의 방문 동기를 분석하고, 4장에서는 문화산업 내에서 박물관이 차지하는 위상과 재원의 문제를 다룬다. 5장에서는 전시와 해석 및 교육 관점을 집중 조명하고, 6장에서는 박물관의 미래 변화 양상을 전망한다. 전반적으로 박물관학 전체를 아우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구성이나, 개인적으로 6장에서 다룬 미래 전망이 매우 부족하다고 느꼈다. 비정형의 예술 작품이 증가하고 있고, 예술 경험 자체가 사이버 공간의 가상 영역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와 미의 거대 신전 역할을 담당하는 현재의 박물관/미술관 모델이 언제까지 존속될 수 있을지, 사이버네틱스 시대의 박물관은 어떠한 형태일지에 대한 도전적 논의가 필요하나, 이 책에서는 당대(이미 10여 년 전)까지 가시화된 급진적 형태들에 대한 조망 수준에 그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봤던 대목은 제3장 관람객 파트였다. 나름 소비자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수용자 관점의 접근은 늘 관심을 끈다. 박물관/미술관 방문과 같은 문화예술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이 이어져 왔는데, 공통으로 지적되는 바는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력 등이 문화예술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49p). 아무래도 많이 배우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또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많이 배울 수 있다. 또 그런 사람들은 경제적 여력이 생기고, 그에 따라 문화예술에 지출할 자본도 풍부하다. 즉, 문화예술 참여 요인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서로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변수들의 집합이다. 문화예술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개별 요소의 개선보다는 사회 전반의 경제 여건을 개선하는 더 큰 차원의 구조적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사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건은 오히려 일차적 요인이다. 객관적 지표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스스로 인지하는 현재의 자기 정체성과 앞으로의 지향점에 대한 상(像)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가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주변 인물 중에서도 딱히 그것을 권유하거나 함께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 삶의 지향점에서도 문화예술에 대한 지분이 전혀 없는 경우 박물관/미술관에 자발적으로 찾아 들어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막대한 기회비용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는 이유는, 문화예술 및 역사에 대한 경험(대상과 신체가 단일 시공간에서 물리적으로 직접 맞물리는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거나 미적 안목을 향상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체험의 가치를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지향할 의사가 없는 사람이 새삼 자발적으로 박물관/미술관을 찾을 확률은 낮다. 이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너무나 많은 즐거움이 산재한다.
한 공동체 전체 구성원의 경제적·문화적 여건을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끌어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얕은 수준의 체험 기회를 폭넓게 확대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다. 의무교육 과정에서 문화예술 체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전원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의무적 단체 관람 형태가 되어서는 곤란하고, 학생 각자의 취향을 고려한 기관과 전시를 각자 선택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 소수 그룹 단위의 맞춤형 관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문화예술 전문가들과의 접점을 늘려 문화예술 활동과 진로 자체를 선망할 가능성을 열어 주어야 한다. 전문가 초청 특강이나 직업 체험 형태를 통해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높은 수준의 만족도를 느끼는 삶의 형태를 간접 경험하게 하고, 박물관/미술관을 찾으면서 나름의 비평적 해석을 덧붙이는 행태가 새로운 삶의 준거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가정 여건상 사적 경로로 문화예술의 가치를 체험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공교육 제도조차 오직 입시 일변도로만 내달린다면, 전 생애를 좌우할 미적 경험의 가능성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좋은 전시와 작품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점, 그것을 보고 해석하는 권한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을 어려서부터 제대로 가르쳐 각자의 비평적 안목을 점진적으로 키워줘야 한다. 학생 수는 감소하고, 교육 예산은 증가해 양질의 체험학습 여건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지금이 문화예술 교육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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