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원의 「토텐탄츠와 바도모리: 중세 말 죽음의 춤 원형을 찾아서」

죽음과 동행하는 법

서구 시각 예술에서 해골 도상은 나름의 두터운 문화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예가 바니타스(Vanitas) 정물이다. 더없이 안락하고, 아름답고, 풍요롭고, 윤택한 곳에 해골이 난데없이 등장해 떡 하니 자리를 잡는다. 해골과의 불편한 동거는 음산하지만 한편으로 해학적이다.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순간에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는 생의 헛됨을 강조하며 삶을 되돌아보라 종용한다.

모든 이미지에는 원형이 있다. 바니타스의 해골은 중세 말에 등장했던 토텐탄츠(Totentanz)의 축약본이다. 독일어로 tote는 죽은 자를, tanz는 춤을 의미한다. 즉, 토텐탄츠는 죽은 자들의 춤이다. 바니타스에서 해골은 두개골만 덩그러니 남아 향긋한 꽃과 과일에 둘러싸여 있지만, 토텐탄츠의 해골은 어엿한 몸뚱이와 사지, 그리고 동반자를 갖추고 있다. 몸뚱이에는 뼈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앙상하긴 해도 썩어가는 살가죽이 아직 붙어 있다. 더러는 군데군데 패이고 찢겨 장기가 튀어나와 덜렁거리기도 했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은 상태다. 무덤에 묻혀 썩어가는 과정에 느닷없이 불쑥 몸을 일으킨 형국이다. 말 그대로 죽음의 아이콘이다.

‘라 셰즈 듀’ 당스 마카브르, c.1400-1425,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당스 마카브르
Fichier:01 La Chaise-Dieu – La danse macabre, https://fr.wikipedia.org/wiki/Fichier:01_La_Chaise-Dieu_-_La_danse_macabre_1.JPG

죽음은 중세 말 신분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손을 잡아끌고서 납골당으로 향한다. 교황으로부터 황제, 공작, 기사, 상인, 농부, 걸인, 예술가 등 예외가 없다. 죽음의 손에 이끌린 자들은 고귀한 자로부터 천한 자까지 신분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더러는 강력히 저항하고, 더러는 소극적으로나마 억울함을 표현한다. 더러는 체념한 채 도살장 끌려가듯 축 늘어져 따라가기도 한다. 어쨌든 종착지는 모두 같다. 오직 죽음이다.

알프스 이북의 오늘날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중세 말부터 광범위하게 표현된 토텐탄츠는 일종의 공공 미디어였다. 공공 미디어 중에서도 오늘날로 치자면 블록버스터급 스펙터클이었다. 대성당, 수도원, 공동묘지 울타리 등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장소에 가로로 넓게 펼쳐진 연속적 도상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개인화된 시각적 미디어가 달리 없는 세상에서 아침부터 잠들기까지 고된 노동에만 종사하던 일반적인 중세인의 시각에서 총천연색의 토텐탄츠는 강력한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체로 토텐탄츠 속 죽음과 인물은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졌기에 몰입감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인류 보편의 관심을 끄는 주제이므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각계각층의 현실적 인물들이 판타지적 존재인 죽음과 손을 잡고 동행하며 윤무를 추는 장면은 짐짓 충격적이었으리라. 실제로 토텐탄츠가 공개된 장소에서는 그것을 보려는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이뤘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단 한 지역에서 토텐탄츠가 화제에 오르면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작품을 공공장소에 그리기 위해 경쟁하듯 의뢰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높은 관심을 끌었기에 토텐탄츠를 그대로 본뜬 인쇄물들도 성황리에 출판되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파괴되거나 훼손된 토텐탄츠의 원형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한 루돌프 파이어아벤트, 1806, 바젤 토텐탄츠의 수채화 복사
Johann Rudolf Feyerabend: Basler Totentanz oder Tod von Basel, 1806, Aquarellzeichnung, Historisches Museum Basel, nach einem spätmittelalterlichen Wandbild, 1439/40 (1805 zerstört), das sich an der Innenseite des Laienfriedhofes des Predigerklosters in Basel befand,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istorisches_Museum_Basel_Totentanz.jpg

토텐탄츠는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도상이지만, 이미지 자체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 이미지를 설명하면서도 직접적인 교훈 및 교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를 동반한다. 바도모리(vado mori)는 ‘죽음에 발을 들여놓는다’라는 뜻으로, 토텐탄츠 이미지에 첨부되는 대화형 시를 일컫는다. 통상 죽음이 4행으로 인간에게 말을 걸면 죽음에 붙들린 인간이 다시 4행으로 답하는 형식이다. 죽음은 각 인간의 신분과 행적을 고려하여 그간의 죄과를 인식시키면서 죽어야 할 때임을 알린다. 인간은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 당황과 공포를 감추지 못하면서 신의 자비를 구한다거나 억울함을 토로한다. 예외적으로 15세기 말 뤼베크 토텐탄츠에서는 인간이 먼저 말하고 죽음이 답하는 형식으로 바뀌는데, 이는 운명에 내맡겨진 인간이 아닌, 스스로 묻는 인간으로서의 인문주의적 격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토텐탄츠는 도상을 풀이하면서 교훈을 강조하는 바도모리와 결합 되면서 비로소 형태와 내용이 결합된 복합적 공공 미디어로서 기능이 구체화된다.

바니타스의 원형이 토텐탄츠라면, 토텐탄츠도 원형이 있어야 한다. 토텐탄츠의 원형은 이미지의 본격적인 발흥보다 200여 년 앞선 설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3인의 산 자가 3인의 죽은 자를 만나 죽음의 필연성을 깨우친다는 민속 전설과 그 주제를 표현한 벽화가 유행이었다. 또한, 산 자가 죽은 자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죽은 자에게 감사한다는 설화도 유행이었다. 이러한 설화들은 죽은 자를 현재 세계로 소환해 산 자와 교류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토텐탄츠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전범에 가까웠다. 이 민속적 이미지들이 토텐탄츠의 원형이다. 다시 그러한 민속적 이미지들의 원형까지 파고 들어가자면 에트루리아의 매장 풍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그러자면 한도 끝도 없이 소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삶이 동반한다는 메타포 자체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뤼베크 토텐탄츠(1463)의 석판화 복제(1842), https://de.m.wikipedia.org/wiki/Datei:Totentanz_L%C3%BCbeck_1701.jpg

중세 말 북부 유럽에서 토텐탄츠가 발흥했다는 사실 자체로 놀랄만한 이유는 없다. 당대는 그야말로 죽음과 가까운 때였다. 흑사병을 비롯한 가공할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이유도 모른 채 수억 명이 목숨을 잃는 유례없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전쟁, 기근, 자연재해도 끊이지 않았다. 고귀한 자들로부터 농민들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철옹성처럼 견고했던 교회 권력도 흔들렸다. 두 명의 교황이 서로 자기가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교황의 옥좌가 빈 채로 방치되기도 했다. 교회가 민중을 보듬지 못하는 사이 종교개혁의 전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믿음의 구심점을 상실한 민중들은 신의 빈자리를 죽음의 공포로 채웠다. 죽음을 일상의 소재로 올렸고, 죽음의 이미지에 빠져들었다.

진짜 놀라운 대목은 교회가 죽음과 유령의 담론을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죽음의 이미지를 설파했다는 점이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 산 자와 같은 시공간에서 교류한다는 개념 자체가 교리상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이나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는 기적은 존재하나, 죽은 자가 물리적 시공간에서 형체를 입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면서 산 자에게 경고장을 날릴 수는 없다. 교훈을 설파하는 일은 오직 신과 그 대리자인 성인 및 성직자의 역할이다. 교회가 죽은 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순간은 최후의 심판밖에 없었다. 독생자가 이 땅에 다시 올 때 죽은 자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 심판한다는 것이다. 신성성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들이 산 자에게 나타나 교훈을 던질 까닭은 없다.

하지만 중세 말 복합적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기독교의 권위가 흔들리고, 교회 내에서도 개혁적 수도원들의 자정작용이 활발해지면서 대중에 대한 장악력이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교회는 민중의 영적 삶을 통제하고 행동규범을 제시하는 유일한 공적 권력 기구로서의 권위를 일정 부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는 대중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관심을 보이는지, 그리고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민중의 삶은 죽음과 가까웠고, 죽음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교회는 그 이야기를 차용해 설교했다. 특히 개혁적 수도원 운동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마주하는 민간 설화들을 설교에 적극 차용함으로써 민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내세적 삶에 대한 갈망을 키웠다. 현세가 죄악으로 가득하고, 그로 인해 심판받을 날이 가까웠다면, 현재 손에 거머쥔 모든 물질적 소유는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끌어들인 설교는 대중으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하는 논리적 장치였다. 죄를 고백하게 하고, 현재 삶의 가치를 일시적이고 허망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게 만듦으로서 내세의 영원한 삶만을 희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민중의 생살여탈권은 다시금 교회 권력에 위탁된다.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교회 권력은 그렇게 다시금 민중의 삶 속으로 깊숙이 현존할 수 있게 된다. 교회가 다시 민중 통치 질서의 중심에 서려면, 교리보다 대중적 눈높이가 더 중요했고, 토텐탄츠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교훈적·유희적 미디어였다. “인간 세상의 문화 문명 변천사를 돌아보면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는데, 그 둘의 중간에 위치한 것이 미디어였다(309p).”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토텐탄츠에서 죽음이 손을 끌고 나오는 첫 인물은 대체로 교황인데, 교회의 지상권을 거머쥔 당대 가장 서슬 퍼런 권력자가 악취를 풍기는 죽음의 손에 질질 이끌려 무덤을 향해 가는 그런 신성모독적 이미지가 어떻게 교회와 공동묘지라는 신성한 공공장소에 떡 하니 그려져 있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죽음은 천하를 호령했던 교황의 오만을 지적하며 죽음의 도래에 관해 무감각했음을 당돌하게 지적하지 않는가? 현재 도상에서 재현된 인물상에 정확히 대응하는 실존 인물인 교황이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적나라한 풍자가 가능했을까? 뒤이어 등장하는 황제나 공작도 권위의 무게감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실권자로서 권한이 막강했는데, 어떻게 불경한 패러디의 소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들도 이런 그림의 존재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텐탄츠를 제작하고 공개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강한 충격요법이 필요했던 당대의 사정을 반증한다. 당대 교회의 위기감은 그만큼 팽배했으며, 또 한편으로 이러한 시각적 매체가 그동안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었다는 경험적 사례들도 토텐탄츠의 제작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토텐탄츠와 바도모리, 그리고 그들의 후예인 바니타스에 이르기까지, 서구 시각문화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세상의 명성과 쾌락이 언젠가는 반드시 지나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당연히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여정에 들어가는 셈이니 토텐탄츠의 주제 자체는 그야말로 영속적 진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불멸의 이미지가 낭만주의를 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복 재생산된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누가, 그리고 왜 이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입하느냐 하는 점이다. 현재란 아무 의미도 없으니,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라는 메시지를 통해 누가 득을 보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중세 말 혼란기에 현재가 의미 없다는 말은 헛된 국내외 정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한낱 의미 없는 재물도 교회에 모두 바치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곧 죽게 생겼는데 한낱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는 일갈은 오늘날에도 사이비 무당이나 성직자들이 줄곧 되뇌는 단골 가스라이팅 레퍼토리 중 하나다. 바니타스 정물의 값진 보화와 음식 옆에 놓인 해골은 그 물질을 소유한 이들에게 깊은 자아성찰의 외적 증거 기능을 하며 더욱 떳떳한 자랑질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한편, 그 그림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야 하는 노동자들은 해골을 보며 그림의 소유주와 신분 차이를 떠나 죽음이라는 예정된 결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현실에 체념하여 노동에 더욱 전념하게 될 터였다.

Franciscus Gysbrechts, Vanitas, c.1872-1876,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ranciscus_Gysbrechts_-_Vanitas_-_WGA11012.jpg

“정말로 그것(죽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248p).”라는 말은 진실이지만,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우선 각자 삶의 실존적 경험과 결부된 깊은 내적 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나 자신이듯, 필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죽음과 동행하는 삶이란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그 숙명을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살고자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지, 허무주의에 빠져 타자의 삶만 떠받치다 간다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삶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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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원의 「토텐탄츠와 바도모리: 중세 말 죽음의 춤 원형을 찾아서」”에 대한 답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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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통은 이생의 자랑과 쾌락의 덧없음까지 언급하는데, 이 글에선 그런 생각을 주입해서 덕을 보는 자, 가스라이팅의 주체까지 지적해 주셨네요.

    Vanitas는 알았지만, Totentanz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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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한국 학자가 20년동안 독일에서 유학하며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더욱 의미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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