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고작 100여 년 전쯤에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을까? 황폐화된 조국에서는 도무지 살아갈 길이 없어서, 혹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강제로 붙들려 극한의 추위가 휘몰아치는 이역만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기서도 가장 혹독하고 버려진 땅을 불하받아 죽을 둥 살 둥 아득바득 밭을 갈고 가축을 쳤다. 숱한 희생 끝에 그나마 살아갈 만한 땅이 되었다 싶으면... Continue Reading →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Herta Müller, Atemschaukel/The Hunger Angel 추모의 글쓰기,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들 일반적인 ‘수용소 문학’과는 다른 길을 가는 작품이다. 우리는 통상 이 장르 문학에서 수용소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계기, 수용소에서의 처절한 삶, 거기서 만난 인물들 간의 동료애와 갈등, 불굴의 의지를 통한 위기의 극복, 수용소 밖에서의 삶과 적응에 관한 이야기 등 굵직한 서사를 기대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도 물론... Continue Reading →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
Jean-Baptiste Andrea, Veiller sur elle ◐ 스포일러 다량 함유 ◑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거나, 더 가치 있게 죽거나 미술사에서 회자되는 전설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처럼 위대한 조각가들의 창작이란 돌을 깎아내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형상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조각가는 바로 그 형상을 발견해 끄집어낼 뿐이다. 이러한 진술은 위대한 조각가의 전기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종의 전설이자 신화다. 여기서... Continue Reading →
경제엽 개인전, 「먹고사는 것」展 (OCI미술관 2층)
고정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꾼을 기다리며 그를 눈여겨 본 계기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과 오픈스튜디오였다. “대다수 동료 작가가 자기 꿈, 환상, 망상, 욕망, SNS와 씨름할 때 경제엽 작가는 홀로 이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그가 무슨 대단한 투사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휙휙 돌아가는 세상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진솔하게 다뤘고, 보통 사람의 삶을 그렸다. 부조리하게 꿈틀거리는 구도, 음울한 색감, 사연을... Continue Reading →
론 뮤익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Ron Mueck, 2025.4.11.-7.13. MMCA Seoul &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한끝차이와 천지차이 론 뮤익 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주말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은 인파는 그야말로 미술사적이었다. 안국역에서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구간은 천금 같은 우회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차들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기어코 교통경찰이 출동했고, 미술관 앞 2차선 길에는 라바콘도 세워졌다. 37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를 뚫고 손에... Continue Reading →
김유태의 「나쁜 책: 금서기행」
금서를 구하자 서론을 읽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화부 기자이자 시인인 저자는 오래된 책들의 전당인 도서관에 대한 상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지 묵은 고서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에 대하여 절절한 어투로 웅변한다. 명저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명저를 만나는 일, 그야말로 하나의 보석 속에 박힌 또 다른 보석을 발견하는 일의 기쁨을 논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Continue Reading →
리아넌 메이슨 외 2인의 「한 권으로 읽는 박물관학」
Rhiannon Mason, Alistair Robinson, and Emma Coffield, Museum and Gallery Studies: The Basics “문화유산과 전통이라는 용어는 종종 서로 치환되어 사용되면서, 암묵적으로 연속성을 본래부터 좋은 것으로 보는 보수적인 이상형을 만든다.” 81p “모든 전시는 하나의 주장이다.” 276p 지금이 박물관 문턱을 낮출 적기다. 늘 하는 얘기지만, ‘한 권으로’, ‘하루 만에’, ‘단번에’ 등 표현이 제목에 들어가는 책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Continue Reading →
처음으로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다섯 가지
당신이 연구자로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언젠가는 학술대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학술대회는 아직 완성본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동료 연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이다. 연구실에만 처박혀 작성된 논문은 겉보기에 그럴싸하지만,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어딘가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연구진 간에는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상태더라도 연구진들은 어디까지나 ‘내 연구(=내 새끼)’를 보는 상황이므로 객관성이... Continue Reading →
이백철의 「감옥이란 무엇인가 1, 2」
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표면만 생각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다. 모든 물질과 현상에는 이면이 있다. 비 내리는 풍경에 도취하다가도 빗물받이와 우수관로의 청소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버스를 타다가도 준공영제의 성과와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가꾸다가도 장내 미생물의 생태계를 생각해야 한다. 다정한 눈 맞춤과 대화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대기에 흐르는 껄끄러운 기운을 감지해야 한다. 시시각각 오감을... Continue Reading →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村上春樹 Haruki Murakami, 1Q84 당신은 이런 사랑을 믿습니까? 이 소설에는 초자연적 능력을 갖추고 태곳적부터 인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온 리틀 피플이라는 군집도 나오고, 그들이 만드는 공기번데기와 복제인간도 등장하며,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이 물리법칙을 비웃듯 지구 중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두둥실 떠 있는 장면도 담겨 있지만, 작품의 판타지적 측면은 그런 자잘한 설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Continue Read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