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2014)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은 넓고, 미술관은 많고, 소장품은 더 많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미술사 교과서에서 눈이 닳도록 봐왔던 대가들의 작품은 유럽 주요 도시에 대단히 한정적으로 분포한다. 그들 내부적으로는 지리멸렬했던 전쟁과 수탈,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서 수 많은 작품들이 원래의 거처를 떠나 이리 저리 옮겨다녔지만, 현재 시점에서 유럽 외부로 유출된 19세기 이전 작품의 수는 1%를 조금 넘는 수준이 아닐까 한다(러시아를 유럽 外로 보면 1%를 넘을 것이다.). 확실히 2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술의 패권은 유럽이 쥐고 있었고, 그들이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공고한 규범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2014년 작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미술사 규범의 중심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를 목도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사의 중심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스쳐지나가는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식민지배자로서 ‘대영제국’의 힘 덕분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강압적 전리품으로, 혹은 선의를 가장한 담보물로, 혹은 왕, 자본가, 귀족 개개인의 탐욕적 수집품으로  인류의 아름다움에 대한 보고서들을 취합했고, 다수 대중을 위한 공익적 개방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패턴은 프랑스, 로마, 심지어 신흥 대륙인 미국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한 끼 밥 값으로 수 많은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게된 이유이다.

작년에 이 다큐멘터리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 그 상영 시간의 얄궂음으로 인하여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이 내게는 한이 되었다(평일 10시 또는 16시 상영 / 주말 상영 없음). 그 많은 상영관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밖에 상영을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작품이 드디어 유플릭스 정액제 영화로 풀린 까닭에 (합법적인) 감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멀티플렉스에 대한 나의 원망은 “아니, 이런 걸 상영했었단 말이야? 대한민국에서?”라는 경의로 바뀌게 되었다. 나레이션 한 마디, 설명 자막 한 줄도 없이 꽉 채운 세 시간이라니… 이건 정말 미술과 미술관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행이다.

이러한 불친절한, 긴 호흡의 관찰형 다큐멘터리는 프레데릭 와이즈먼 옹의 전매특허라고 한다. 사실 나레이션이 없는 것 자체는 좋았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서 한 명의 참여자가 되어 미술관 운영 회의에도 참석하고, 문화강좌도 도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 큐레이션을 들을 때, 억지로 “아,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하지만 복원 작업과 관련해서는 좀 더 알고 싶었던 영역이라 부연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금박 장식 작업이 예전 방식 그대로인지, 아니면 현대적으로 개발된 기술인지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 작업 풍경은 내게 있어서 이 작품의 최대 미덕이 되었는데, 돋보기 안경(이거 되게 갖고 싶다.)을 끼고 한 땀 한 땀, 물감을 찍어 원형을 살려내는 장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 화가와 복원가의 차이는 습자지 한 장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벤스가 가장 위대하다고 전제하고, 루벤스의 1급 제자와 루벤스의 복원가 둘 중 누가 더 위대할까? 최종적으로 복원된 그 작품을 보고 있는 현 시대의 ‘나’의 관점에서 그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 것 같다.

또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작품을 최초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그런 논쟁이 존재한다며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가’의 관점을 강조한다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1600년대 작품이 1700년대의 바니시 복원으로 인하여 변색되었다면, 그러한 변화 자체가 하나의 아카이브로서 작품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원형 그대로를 100% 복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그가 렘브란트와 겸상을 하고 작업실에서 와인을 나눠 마시며 플랑드르 미술 트렌드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던 이상, 그것이 100% 원래의 상태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현재 한 명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물며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1495)>라면 어떨까? 다빈치가 오늘 환생한다면 성모의 옷에 채색된 청색을 마음에 들어 할까?

하지만 미술 작품은 갤러리에 존재해야 하고, 그것을 보러 온 관람객에게 만족을 주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만리타국에서 날아온 애호가들에게 본연의 정갈한 빛을 잃어버린 베르메르를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예술은 없다. 가장 높은 차원의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내셔널 갤러리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자본을 향한 투쟁은 다큐멘터리 전반에 걸쳐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치열한 재정 회의를 하면서 추계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장면에서는 직장인으로서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진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이 끝나갈 무렵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부러움과 질투가 솓구쳐 오른다. 이 작품을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촬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카메라가 담아낸 특별전만해도 다빈치, 터너, 티치아노 전이다. 그냥 워낙 소장하고 있는 대가들이 많으니까 돌아가면서 한 명씩만 특별전을 해도 수백년간 레파토리 걱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예술적 저변이 참 부럽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떤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씬에서 그 해당 작품이 아닌 옆, 뒤에 있는 작품들도 곁가지로 비쳐지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 작품들도 ‘구멍’이 없이 하나 같이 미술사 교과서 표지를 장식할 만한 인류 문화유산급 작품들이다. 그 어떤 명작도 무덤덤해질 정도의 컬렉션이라니… 참 부럽다.

언젠가 나도 다빈치 전을 기다리며 줄 서 있는 저 수 많은 관람객 중 하나가 될 날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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