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넬로 벤투리의 「미술비평사(출1964, 역1988)」

이 책을 받고 놀랐던 점은 1988년에 초판을 발간한 후, 이듬해인 1989년에 2판이 나왔으며, 그 2판의 8쇄가 나온 것이 2017년 1월이라는 사실이다. 1쇄를 천 부씩 찍었다면, 2판을 기준으로는 약 28년 동안 8천 부 가량이 팔렸다는 것인데, 아주 긴 기간동안 적은 부수 라도 꾸준히 찍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스테디셀러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출판사 입장에서도 미미한 판매량을 감안하고라도 절판시켜선 안될 만큼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좋은 책은 절판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문예출판사 측의 의지가 엿보여 미술애호가로서 칭찬해 주고 싶다.

「미술비평사」의 초판은 1948년에 세상에 나왔고, 문예출판사에서 번역한 버전은 저자 사후에 발간된 1964년 판이다. 1988년에 번역 출판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을 읽는 것은 거의 번역 내지 해석 수준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미(美)라는 관념의 세계에 대하여 논했던 걸출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당연히 어느 정도 어려운 책이 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번역 30년 후인 2018년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있어서 그 어려움은 종종 고통의 수준이었다는 엄살도 충분히 용인된다. 절반 이상의 문장이 한 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한다. 나름대로 미술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렇다니…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구체적인 문장들을 살펴보면,

요컨대 훼리비앙의 저서는 특히 푸생이라든가 이탈리아 저술가들로부터 이끌어 낸 판단이나 원고를 편집한 것으로, 그들이 17세기 후반의 빠리에 함께 흘러 들어 왔던 고전주의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눈에 띄게 무질서하며 엄격한 합리성의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 156p

그 중 첫번째 논쟁은 1676년에 로제 드 삘레에 의해 작성된 루벤스 옹호론에서 비롯되어, 소묘, 고대인, 그랑 구라는 이름으로 색채, 근대인, 진실을 옹호하는 루벤스 파에 대항하는 푸생 파의 투쟁으로 끝났다. – 162p

이런 식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약 기적적으로 제3판이 나오게 된다면 이 복잡한 서술구조와 직역투의 문장이 보다 간명하게 바로잡히길 바라본다.

고대와 중세 파트는 당대의 미술비평 자체가 빈곤했던탓에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17세기 이후 분량과 거의 비슷하다. 등장하는 이름들이 생소하고 매우 함축적인 설명으로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면서 다음 장으로 이동하기가 어렵다. 너무나 많은 비평가들과 미술가들의 이름이 짧막하게 언급되고 이내 사라진다. 그 이름들을 외우는 것은 고사하고 흐릿하게나마 뇌리에 붙잡아 두는 것 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친절하게 기초를 닦아주겠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중세의 끝자락에 조토와 보카치오의 이름이 등장할때쯤 되어서야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우도 쿨터만의 「미술사의 역사」가 미술사를 만들어간 어느 정도 학자적 경향이 다분한 사람들에 대한 논의라면, 리오넬로 벤투리는 미술에 대하여 언급하고 비평한 각계각층의 미술가, 이론가, 문학가 등 보다 폭 넓은 인사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는 역사 서술의 지적 장벽이 미술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에 비하여 더 높고, 그 만큼 더 많은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미술비평의 역사를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저자 고유의 관점을 바탕으로 각 저술들을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비평에 대한 비평, 일종의 ‘메타비평’이다. 이때 저자의 주된 비평적 관점은 비평가가 얼마나 균형잡힌 안목을 지니고 있는가에 있다.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어느 한 쪽에 경도된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규준에만 집착하고 동시대의 미술을 돌아보지 못한 헤겔, 빙켈만 등의 선배들에게도 질타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맺음말에서는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비난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비평적 관점에 대해서 더욱 냉엄하게 꼬집는다. 진정한 비평가라면 현재의 직관을 토대로 과거를 바라보고, 현재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통찰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시피한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미술에 관한 판단과 미술사의 흐름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우리 모두가 늘 전제하고 있어야 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를 하나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취미(taste)이다. 미술사에서 가장 완벽하고 보편적인 미적 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조차 결국은 누군가의 취미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이 가르침은 절대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갈구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예술계의 보이지 않는 권력과 그 권력에 분노하는 모든 이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본질적인 것이다. 무수한 찬사와 비방을 받으며 미술사를 수 놓은 대가들 조차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은 당대의 취미였을 뿐이라는 것이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밝혀지곤 했다. 현재 미술계의 다양한 논쟁들에 대하여 우리는 각자의 근거와 직관을 토대로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모든 판단들은 결국 취미라는 단어로 귀결될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시대를 뛰어 넘는 절대적인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취미는 예술이 되려는 경향이 있고, 그리하여 취미가 예술에 대해 어떤 가능성인 한에 있어서 자신을 옳다고 하듯이 예술사는 천재의 힘으로 취미가 예술과 동일시되는 순간을 알아 낼 목적으로 취미를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예술사가 비평적 판단과 동일시되는 순간인 것이다.

모두가 미술사를 논할때 미술비평사를 제시했던 선구적인 안목만으로도 이 책은 응당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한 가지 아쉬움은 미술비평의 관점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경제적/정치벽 변동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주로 미술과 사상계 내부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하다못해 프랑스 혁명이나 1, 2차 대전 같은 거대한 사건 조차 미술비평과 이론적 배경의 역사적 동인으로서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다소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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