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퀘어(The Square, 2017)

※ 이 글에 스포일러가 있다고 판단할 여지가 충분히 있겠지만, 사실상 이 영화는 스포일러의 영향으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영화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래도 영화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을거니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읽으면 좋겠죠.

선을 넘어버린 영화

우리는 항상 최고를 꿈꾸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선을 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정한 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얼핏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성을 소개시켜준다는 지인의 말에 “난 그냥 적당히 평범한 사람이 좋아”라고 답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평범하다는 것은 선을 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모든 면에서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은 오직 환상계에서만 존재하며, 어찌보면 가장 이상적인 연애상대이기 때문이다.

섹시한 중년의 수석 큐레이터가 겪은 황당한 이야기들을 다룬 이 영화는 단 며칠동안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을 다루면서도 유럽영화 특유의 느슨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 장장 151분을 할애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충분한 사유의 기회를 갖게 된다.

영화 <더 스퀘어(The Square)>가 요구하는 사유의 지점은 계층화된 사회, 그리고 선을 넘는 행위들에 있다. 먼저,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국립(혹은 왕립)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서 본토인, 백인, 지식인, 교양인, 공인, 미남, 관리자 등 나름대로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에 대비된 존재들인 마이클(이민자/유색인종/조수), 앤(여성/乙), 오해 받은 소년(빈민/어린이), 보노보(동물), 그리고 수시로 앵글에 포착되는 빈민과 난민들은 크리스티안과 정면으로 대치되며 외견상 공정해 보이는 사회에서의 계층화 이슈를 건드린다. 특히 영화가 거리의 난민과 빈민들을 다루는 방식이 끊임없이 긴장감을 형성한다. 크리스티안이 인간애적인 일말의 호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매치기의 피해자로 전락되어버리는 초반부 때문에 관객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너무 일찌감치 상실해 버린다. 그래서 빈민과 난민들이 등장할 때마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배푸는 장면이 보이면 그 호의가 악행으로 돌아올까봐 걱정하게 된다.

또 다른 사유의 지점인 ‘선을 넘는 행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행위예술가 올레그(Oleg Rogozjin)의 원숭이 퍼포먼스이다. 미술관의 이사진과 후원자들을 초청한 격조 높은 만찬 자리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근원적 공포심에 관한 이슈를 제기하기 위해 기획한 원숭이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원숭이가 된 행위예술가는 고고한 이사진들의 심기를 건드리다 못해 몸에 직접 손을 대기까지 하고, 급기야는 귀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던지고 겁탈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이 정도면 됐다, 생경한 맥락에서 타자에 대한 공포감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꽤나 긴 러닝타임을 정적 속에서 홀로 잡아 먹는다. 모션 캡쳐 연기로 명성을 쌓은 테리 노터리(Terry Notary)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롱테이크 원숭이 흉내’는 단순한 모사의 수준을 넘어 원숭이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경지를 보여주었다. 손짓, 눈빛, 호흡, 표정은 물론 근섬유 하나하나까지 유인원의 그것이 된 테리 노터리의 퍼포먼스는 ‘이제 충분하니까 제발 그만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소환하였으며, 선을 넘어버린 행위가 주는 위압감과 공포가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일깨워주는 영화적 체험이었다. 그의 날뛰던 눈빛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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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화된 사회, 그리고 선을 넘는 행위의 교차점에 빈민가 소년이 있다. 우범지역에 사는 소년은 크리스티안이 소매치기범을 협박하기 위해 보낸 편지 때문에 부모님에게 오해를 사게 되었고, 그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크리스티안의 아파트까지 쳐들어오면서 선을 넘어버린다. 그의 분노는 결국 크리스티안에게 계층의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가 얼마나 안일 했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촉매제로서 작용했고, 진심어린 사과를 건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하기도 했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이 절박하게 남긴 사과의 영상편지에서 개인적인 편견과 오해들은 결국 사회구조의 문제들로 치환 및 일반화되면서 희석되어 버리고 만다. 그 장면에서 웃느냐, 인상을 찌푸리느냐 하는 반응의 차이는 사회구조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주체로서 윤리적/공동체적 가치들을 견지해 나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신념의 정도에 따라 갈릴 것이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공간이다.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The Square is a sanctuary of trust and caring. Within it we all share equal rights and obligations.

영화 속 주제가 되는 작품인 <더 스퀘어>의 설명문은 수차례 반복되면서 이 사회 속 구성원들 간에 신뢰와 배려가 결여되어 있으며, 권리와 의무도 각기 가진 권력에 따라 제각각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사각형의 LED 선을 그어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야만 신뢰, 배려, 인격적 동등함 따위의 ‘인간조건’에 해당하는 가치들을 재고할 수 있는 것일까?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치적 올바름’과 난민에 의한 현실적인 공포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타자의 판단을 존중/비난할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이 영화는 끝까지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다만 모순을 보여주며 희화화하고 한 사람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하룻밤의 격정으로 끝나버린 미국인 기자 앤(Anne)의 사랑처럼, 또 그녀에게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크리스티안의 자동응답기 메시지처럼 답 없는 질문 속에 우리는 현존하고 있다. 유투브에 올라온 전시홍보 영상 속 거지소녀처럼 언젠가 이 질문들은 폭발하면서 ‘선’을 넘어, 인류학적 함열의 영역에 치달을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모여서’ 지금 당장 무언가 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자들은 이익집단의 수장이거나, 아직 차마 멸종되지 않은 국가주의자거나, 사이비종교의 창설자거나, 엉터리 철학자(≒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지껄일 수 있는 장(場)이며, 그 장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제도화된 플랫폼 따위가 아니라 ‘누구이건 무엇이건 일단은 내뱉을 수 있고 끝까지 참고 들어줄 수 있다’는 단일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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