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The Chomsky-Foucault Debate: On Human Nature)

언어, 구조, 역사 등 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중에게는 사회/정치적 메시지들로 더 강한 인상을 남긴 두 지식인이 TV 토론에 나섰다. 1971년 11월에 한 네덜란드 방송사의 주최로 진행된 토론회는 폰스 엘더르스(Fons Elders)가 사회를 맡았고, 촘스키(Noam Chomsky)는 영어로, 푸코(Michel Foucault)는 프랑스어로 답했다. 이 책은 그 토론회의 전체 녹취록을 담고 있으며, 그것만으로는 독립된 출판물로서 적정 판매단가와 상품가치를 메꿀 수 없기 때문인지 두 사상가가 주제와 관련하여 남겼던 인터뷰와 강연을 보충하였다.

토론에서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고한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내재적 본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어느 정도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촘스키가 빈번하게 예시로 끌어오는 것은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가 언어와 관습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경험론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도약이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은 인간에게 학습 능력과 체계가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진화론의 관습적 사고방식에 의하여 5천년 전의 어린아이와 현재의 어린아이가 상이한 학습능력을 보일 것이라고 전제하기 쉬운데, 사실상 5천년 전 어린아이를 현 시대에 데려다 놓아도 언어를 학습하는 능력 자체는 현재의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학습 능력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그 능력의 구체적인 양상과 한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먼 미래에는 충분히 가능하며, 또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푸코가 제기한 의문들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상 푸코에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거의 없거나 감추어져 있고, 의문들만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특성에 대해서 그가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을 하나의 설명으로 아우르려는 이론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촘스키의 관념론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갖는 이같은 반감은 ‘권력화’에 대한 뿌리깊은 경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어찌되었든 푸코는 내재적 본성을 하나의 신화로 간주하는 반면, 사회구조 속에서 학습의 한계나 방향을 결정하는 틀(grille)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음 주제인 정치에 대해서는 비교적 합의가 도출되는 듯 하다. 물론 여기서도 큰 뼈대, 즉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 저항을 실천해야 한다는 골자에만 합의가 이루어질뿐, 전제조건은 전혀 다르다. 촘스키는 정의가 존재하며, 가능하다고 본다. 정의는 정, 인내, 연대, 사랑, 평화와 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 가치들로서 그것에 대한 공감대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 억압, 불법에 맞서 정의를 세우기 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은 의미와 정당성을 갖는다. 그에 반해 푸코는 정의 자체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의라고 믿고 있는 여러 가치들은 사실상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권력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 즉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 지점에서부터 말을 아낀다. 촘스키의 열렬한 서명을 들으면서 그저 쓴웃음을 짓는다. 방법론이 다른 것은 조율이 가능하지만 출발점(전제)이 다른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 대해 촘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정의를 말하는데 그는 권력을 말했습니다.”

외견상 충돌로 보이는 지점에서도 두 사람은 정치적 실천이 개별 주체의 일상적 순간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공감하고 있고, 지식인이 먼저 그것에 주목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장막을 들춰내는 실천에 나서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어찌보면 그 실천이야말로 두 지성이 대립했던 ‘정의의 개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 책은 첫 장인 두 사람의 토론이 핵심이지만, 의외로 가장 재미있었던 대목은 그 다음장,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추악한 뒷모습을 낱낱이 까발리는 촘스키의 인터뷰였다. 미국은 자유 진영의 수호자로서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는 국가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상 단일한 목소리의 폭력을 가장 강력한 힘으로 구현했던 나라이다. 메카시즘(McCarthyism)의 광풍은 이미 잘 알려진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워터게이트를 둘러싼 언론의 난리법석은 베트남전의 기본 전제로부터 관심을 돌리려는 술수였다. 베트남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온건파와 강경파라는 두 지점 간의 균형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두 당파가 공유하고 있는 기본 전제, 즉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할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은 자유 진영의 확대를 위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주류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뿐더러, 용감한 소수의 말로는 비참했다. 강력한 사법기구는 그야말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문법을 무기로 전유하여 더 상위의 법(인권, 생명권 등)을 어기고 폭력을 정당화했다. 국가의 불법에 맞써 더 상위의 법을 지키려 했던 자들은 야비한 ‘정치적 사법기구(혹은, 사법적 정치기구)’의 공작에 의하여 서서히 궤멸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유 시장을 향해 더 큰 날개를 펼치는 대기업과 그 공생자들이 더욱 정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순결한 흰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이러한 권력에 대응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푸코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도시-시민 게임’과 ‘목자-양떼 게임’을 합친 괴물이다. 도시-시민 게임은 이성의 정치적 권력을 증대시켜 개인을 억누른 ‘합리적 국가’를 만드는 작업이다. 목자-양떼 게임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 가치인 ‘목자’를 부활시켜 개인과 권력의 의심할 여지 없는 긴밀한 상호관계를 만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권력 관계가 어떻게 합리화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처음에 목자권력으로 시작된 권력관계는 계몽시대를 거쳐 국가이성을 덧입고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정치적 합리성의 두 근본을 파헤쳐야 하고, 가능한 모든 의심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푸코가 우리에게 알려준 국제시민으로서 연대의 의무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1971년 11월의 토론 영상. 유럽에서는 사상가들이 마치 연예인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심지어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특히 사상가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들먹거리며 대중을 쥐락펴락 하는 모습은 참으로 섹시하다. 이 모습이 왜 우리에게 생경한 매력으로 다가올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TV에서 볼 수 있었던 대중적인 사상가의 모습이라는게 거의 도올 선생님 외에는 떠오르지 않으므로…… 어쨋든 영어 자막이 있으니까 시간 나면 보세요. 이런, 유감스럽게도 저는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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