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 지금의 나
출장을 떠나며 10년 만에 다시 하루키를 꺼내들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럴만한 시기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20대의 나는 세상과 사람을 너무 몰랐다. 작품 서두(12p)에 나오는 말처럼, 모든 생각들이 빙빙 돌아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시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나 자신에 대한 사유의 정도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는 마치 인간을 정교하게 흉내내는 사이보그라도 된다는 냥. 나에게는 이 작품 속 다난한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양도 결여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의 나는 여자를 안아본 적 조차 없었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 단순히 섹스라는 행위를 경험해 보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내밀한 행위까지 함께 도달할만한 관계와 과정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진솔한 성애와 성장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어렴풋한 기억 속에 이 책이 그저 ‘야하고 이상하리만치 유명한 청춘소설’ 정도로 남아 있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사람들은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얼마나 과도한 환상을 품던가? 그래서 당시에 내가 이 작품에서 얻었던 사유의 실마리들은 죽음의 의미나 관계의 형태 같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20대에게는 이 정도로 섹스가 일상적일까? (부럽다)’ 하는 한심한 수준에 머물렀었다. 지금 다시 책을 덮으며, 이 작품을 야하게 느꼈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인생은 육체를 조금씩 깎아내는 대신 생각을 조금씩 쌓아 올리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당시 내게는 육체가 너무 컸고, 생각은 너무 작았다. 이제는 그 균형이 맞춰졌을까? 지금은 답할 수 없다. 이 책은 단 한번도 야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정도로 위안할 수 있을 뿐이다. 10년 후에 다시 답을 내보면 더 정확한 시계열의 결론이 도출되겠지.
하루키는 너무나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특히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들려주는 내밀한 사고의 흐름들은 18~20세 화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그 정도 나이라면, 그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을 활자로 풀어내는 작업이 불가능하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38세 하루키가 기록한 18세 와타나베의 생각들은 ‘이런 상황에서 저런 생각을 했던게 나뿐만은 아니었구나’라는 공감과 안도감을 준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와타나베와 나의 닮은 구석들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고, 사색을 좋아하고, 대체로 혼자 있지만 내심 같이 있기를 원하고, 긴 편지를 쓰고, 심지어 성에 있어서 약간은 윤리적인 척하고 수동적인 것까지 비슷하다. 그런데 미도리와 나가사와에게서도 나와 닮은 점들을 발견한다. 미도리와 나는 시선 끌기 좋아하고, 힘든데 내색 안하고, 형식적인 것을 질색하고, 가족과 선 긋고, 현실과 괴리된 전혀 엉뚱한 세계관을 서슴 없이 이야기하는 면이 닮았다. 나가사와와는 세상에 대한 냉소, 스스로에 대한 터무니 없을 정도의 신념, 그리고 자신의 온갖 부조리를 합리화/체계화/일반화하는 능력이 닮았다. 이처럼 「노르웨이의 숲」 속 인물들에게서 닮은 점을 발견하는 신기한 체험이 나에게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자들이 저마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거나, 공감하거나, 수치스러워하거나, 심지어 자기부정하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다. 그만큼 하루키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진실에 가깝다. 얼핏보면 아주 극단적인 경험을 겪은 특수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모두가 겪었던 그 궤적을 고스란히 반사한다. 한 권짜리 소설책이 보여줄 수 밖에 없는 단순화의 경향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인물들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현존재로서 땅에 굳건히 발을 내딛고 있다. 그들이 심지어 교토의 사설요양원에 격리되어 있을때 조차도.
우리가 지금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역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그들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살았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스마트폰, 인터넷, TV에 둘러싸여 사유를 잃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들이 겪었던 정도의 상실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모두 정답일 수도, 반대로 모두 오답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싶은 우리의 간절한 열망, 그 자체이다. 내면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나조차도 미처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세상에서 영원히 묻힐뻔했던 보석 같은 존재들을 발굴하는 그런 대화. 우리는 그런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진실한 관계와 대화를 허망하게 꿈꾸며 살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들처럼, 꿈 속에만 존재하던 진실한 관계는 서서히 지리멸렬한 일상의 순간으로 옷을 갈아 입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또 다시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애써 만들어간다.
관계에서 가장 큰 슬픔은 언제 찾아올까? 내가 생각했던 관계의 깊이에 비해 상대가 보여주는 깊이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얕거나,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를 상대가 인식 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아닐까. 나오코에게는 와타나베가 없었다. 와타나베를 사랑했다면 나오코는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와타나베에게 받는 사랑이 아닌,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사랑하는 마음이 삶의 생명선이 되어 그녀를 강하게 옭아맸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야 하는 슬픔은 결국 죄책감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그녀에게는 의지할 한 구석, 안길 품 하나조차 없었다. 기즈키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던 애틋함, 그리고 와타나베가 보여준 지고한 마음은 알았지만, 아는 것은 그저 아는 것일 뿐 느끼는 것이 될 수 없었다.
고통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서서히 벽이 되어 버린다. 나를 견고하게 둘러싼 벽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밀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의 원인, 과정, 결과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하고, 그것을 빈번히 화제에 올려야 한다. 아주 대단한 감정도 자꾸 이야기하다보면 어느새 일상으로 스며든다. 그저 먹고, 자고, 싸는 것처럼 삶의 풍경이 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더라면,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삶은 한결 가벼워졌을 것이고, 두 사람은 기즈키라는 공통분모를 거치지 않고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너무나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은 굳어진 성벽의 회칠을 더 바싹 마르게 했다. 내면의 모든 질서가 와해되어 버릴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기즈키이다. 그를 공통분모로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또 종결되었다. 그리고 나오코를 중심으로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이야기가 열려 있다. 기즈키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고, 원흉이고, 종착점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게이나 양성애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와타나베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과시욕, 나오코의 불안감, 그리고 나오코의 성적 경험들에 비추어 보면 더더욱 그런 심증을 숨길 수 없다. 아무리 성적으로 개방된 일본이라지만 그래도 1960년대이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상기되던 시점이고, 권위주의의 서슬도 퍼렇던 시절이다. 남다른 성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다. 내밀한 욕망이 견고한 사회적 제약에 부딪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자살로 귀결된 것은 아닐까? 늘 그렇듯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자는 생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10년 만에 이 책을 다시 펴면서, 내 기억 속에 어떤 장면이 남아 있었는지를 떠올려 봤다. 딱 한 장면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말미에 등장하는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정사 장면이었다. 상술했듯, 나는 당시에 여자와 자 본 적도 없는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매우 현실감 넘치는 ‘진짜 어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어른들의 섹스란 이런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품었던 나 자신의 치기가 같잖은데, 또 한편으로는 그게 진실이기도 해서 신기하다. 공유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소중한 한 영혼을 고이 보내주고, 남은 자들끼리 그 시간을 육체의 기억으로 영원히 각인하기 위하여 숭고할 정도로 치열하게 치루어낸 제의(祭儀). 특히 레이코가 쿡쿡 웃을 때마다 페니스로 그 진동이 전해졌다는 표현은 지금까지 그 어떤 예술 작품의 정사 장면도 담아내지 못한 구슬픈 리얼리티이다.
삶과 죽음의 뒤섞임.
죽은 자로 이어진 산자의 인연.
사랑, 연민, 책임감이 뒤섞인 감정의 홍수.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너무나 현실적일 수 밖에 없는 관계의 양상들.
애초에 이런 모호한 것들을 합의된 언어로 온전히 담아내려는 노력은 부질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것에 성공하고, 또 누군가는 그 성공의 열매를 따먹으며 생각을 키운다. 그렇게 걸어간 인류의 발자취 한 귀퉁이에 분명 이 책이 놓여 있을 것 같다.
글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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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글이 유독 잘 안써질때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때는 내 얘기가 아닌 것을 쓰고 있을 때더군요. 어떤 얘기가 진짜 내 얘기고,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때 쓴 글은 누가 봐도 좋은 글이더라고요. 이 소설을 오랜만에 읽고, 또 쓰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성이란게 정말 중요한데 어찌보면 참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내 얘기”를 하면 되는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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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시해야한다는 말이 가장 와닿네요
항상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야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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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기다 털어 놓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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