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미쇼의 「예술의 위기: 유토피아, 민주주의와 코미디」

Yves Michaud, La Crise de l’art contemporain (1997)

“소위 말하는 현대 예술의 위기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고, 그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다.”

229p

예술이 아닌, 우리의 위기

이야기는 1990년대 초반 프랑스 현대 미술을 둘러싼 좌우 논쟁으로 시작한다. 현대 미술의 비판자들은 그것이 무분별하며, 공감을 얻지 못하고, 퇴폐적이며, 염세적이라고 까내린다. 옹호자들은 그 비판자들이 여전히 구습에 얽매여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옹호자와 반대자 사이의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저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명한 역사적 도식을 끌어다 쓴다는 것이다. 사실 미술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들은 15세기 이후로 그친 적이 없다.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단순히 대리석 무더기나 보자고 로마로 간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더 중요하다. 옹호자와 반대자 모두 상대방의 표층만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다. 주장의 심층에 대하여 숙고하지 않고 떠들어댄 말 자체에 집착한다. 그런데 예술의 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으므로, 역사철학적 숙고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서로 눈 가리고 펀치를 주고받는 꼴이다. 일례로,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은 기술복제 시대에 고전적 예술의 아우라가 파괴되면서 미학적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우리가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해바라기를 책받침으로, 엽서로, 우산으로, 컵 받침으로, 심지어 넥타이로 아무리 뻔질나게 전용한들 그 신성성이 침해를 받았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세속화는 명백한 사실이고, 미술관에 의해 다시 신성화되고 상업화된 후기-아우라적인 예술 속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32p).” 이 두 가지 현실이 양립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숙고의 첫걸음이다.

반대자들은 향수에 젖어 있고, 영원한 제국을 꿈꾼다. 그들은 여전히 단일하고 명쾌한 기준을 원한다. 옹호자들은 미술을 통하여 사회적 변혁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이러한 각각의 열망은 그들이 전쟁터에 뛰어든 명분과 당위성을 제공하는데, 서로는 상대방의 심층을 들여다볼 수 없고, 그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므로 위기론은 기세를 더한다. 이 같은 동상이몽 가운데 논쟁은 종식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그리고 양측이 자신들의 명분으로 인질 삼은 ‘대중’은 정작 그 평행선에서 벗어나 팝콘을 먹으며 디즈니 영화를 보고 있다.

위기론은 언제 대두되는가?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답은 없지만, 가시적인 영역에서의 뚜렷한 쇠락이 위기론을 부추긴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쇼(Yves Michaud)는 그중에서도 시장 가격에 주목한다. 미술 작품의 가격이 하락하면 대중은(심지어 전문가라는 분들도) 그것을 쇠락의 징후로 받아들인다. 숫자의 직관적 자명성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0년대 이후 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논쟁도 “1973년 이스라엘-아랍의 10월 전쟁의 후속으로 오일 쇼크 이후 예술 시장이 후퇴 속으로 들어갔던 순간에 발달하였다(115p).” 하지만 그 어떠한 숫자를 마주할 때라도, 우리는 그것이 본질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술 작품의 시장 가격이 폭락하는 현상은 작품의 여러 일면 중에서 단 한 가지 측면, 즉 교환되는 자본재로서의 가치에 일부 손상이 가해졌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하나의 작품이 자본재로서 가치를 상실했다고 해도 예술의 신전에서 쫓겨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예술이 맡은 역할은 늘 그 이상이다.

「예술의 종말」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의 위기」를 읽었다. 전자가 완전한 다원주의가 도래한 이후의 세상에 주목하였다면, 후자는 그 다원주의의 세상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장통에 주목한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거의 비슷하다. 이제 미술에 대한 강령이나 당위성, 거대 서사는 끝났으며,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적응하지 못한다면 스스로가 구시대의 유물 신세가 되어버렸음을 자인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에피스테메(épistémè)의 변혁이 이루어졌는데도 계속 과거의 미학적 기준들로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니 당연히 위기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쇼가 세심하게 들여다 본 결과, 진정 위기를 맞은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둘러싼 담론, 제도, 시장, 행정이었다. 다시 한번 인류사 전체를 꿰뚫는 일반화를 시도한다면, 예술 자체가 위기를 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심지어 성상파괴운동과 나치즘의 참화 속에서도 예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타올랐으며 제 역할을 다 했다. “소위 말하는 현대 예술의 위기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고, 그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는 바의 위기이다(229p).”

결국, 논쟁에서 사회, 문화, 역사, 경제,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컨텍스트가 빠져 있다. 미술 시장의 위기에 대하여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전반적인 투자자본이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주식시장, 부동산 등 전통적인 투자 대상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자본재로서 미술은 반대급부의 호황을 누릴 수 있다. 그보다 큰 대규모의 경제위기는 미술 시장에도 동반의 타격을 입힌다. 이렇게 거시경제에 맞물려 좌충우돌하는 미술 시장의 가격을 토대로 미술의 위기를 들먹거리는 일은 절반만 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장의 위축이 초래하는 결과를 보는 편이 낫다. 예술가가 제값을 받고 작품을 팔 수 없는 환경은 예술가들의 교원화/공무원화를 부추긴다. 교원/공무원이 된 예술가가 늘어날수록 영혼이 담긴 작품의 수는 줄어만 간다. 그리고 들쭉날쭉 널뛰기하는 작품의 가격을 바라보는 대중은 현대 미술 자체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다. 거대한 사기 집단이 탄생했다는 의구심이 심증으로 굳어간다. 미술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별세계의 일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러니 그들이 낸 세금으로 돌아가는 공공 미술계는 제 기능을 상실한다. 악순환이다.

미술 행정의 비대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문제이다. 국가가 미술에 개입하는 까닭은 미술의 유토피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즉,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미술의 기능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통해 대중의 정신, 감정, 지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주의는 미술 행정의 비대화, 전시 기구의 중앙집권화, 미술 관계자들의 협동조직화와 공무원화, 제도 권력에 대한 예술가들의 예속화, 무엇보다도 국가주의 미학의 신성화를 부추긴다. 이브 미쇼가 49~51페이지에 걸쳐 사례로 든 프랑스 미술 관계자 회의의 초대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90년대 중반에 이미 이리도 많은 단체, 위원회, 사조직, 조직들의 결사체 등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걸 떠나, 지금이 단일 아카데미, 단일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시대보다 낫다는 것은 확실한가?

미술 행정의 비대화는 예술가나 대중이 원한 결과가 아니다. 최적의 선택을 위한 이합집산일 뿐이다. 한정된 재원으로 한정된 예술가/작품을 선택해야 하고, 소위 말하는 공공성도 담보해야 하니 의사결정의 주체와 체계도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대화된 행정에서 하나의 선택은 일종의 인증으로 작용하며 다음번의 선택을 보장해주는 경향이 있다. 성공할 가능성이 큰 예술가는 이전에 성공했던 예술가다. 왜 (하필이면) 그가 선택되었는지를 묻지 말라. “사람들은 선택되었기 때문에 선택되고, 전시되었기 때문에 전시되고, 구매되었기 때문에 구매된다. 일단 첫발이 떼어지면, 기구의 사람들은 차후로 그들이 공유하는 취향들에 대해서 안심을 한다(53p).”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들 활동에 대한 이러한 통제, 모니터링, 상표붙이기 기구에 대한 종속은 파국적이다(54p).”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자들에게 종속되고, 결국 그들의 판단 부재와 신념의 허약함을 내재화(55p)”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반복해서 자신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생산하고, 규격화한 보여주기 원무에 참여하며, 외교관과 신중한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회사 개가 된다. 때로 그들은 아직도 짖는 척한다(55p).” 미쇼가 20년 후의 대한민국 미술계를 예견하기라도 한 것인가?

부제로 돌아가자.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술의 기능과 이상에 대하여 저마다 품고 있는 상상의 낙원이다. 누군가는 퇴폐적인 미술이 국민의 지성과 감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새롭고 혁신적인 미술을 통해서 일상적이고도 전통적인 경험에서는 누릴 수 없는 새로운 고양된 감수성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현대 미술의 옹호자나 반대자나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품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처음으로 이론적 근간을 제시했던 인물은 역시나 칸트(Immanuel Kant)였다. 칸트는 미학적 취미판단이 무관심한 관조를 통해 주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면서도 ‘나’의 취미판단이 타자와 교감할 수 있으리라는 보편성의 믿음을 놓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대격변 속에서 대중의 부상을 자각한 칸트는 예술의 유토피아를 시민적 유토피아와 결부하였다. “이 예술의 유토피아는 가능한 의사소통의 유토피아, ‘문화적 동등 사회’의 유토피아, 또는 최소한 문화적 공동체의 유토피아이다. 취향판단의 형식적인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가장 교양있는 사람들과 가장 교양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일 수 없이 분할되지 않는다(214p).” 칸트의 의도는 이처럼 순진했지만, 이 보편성을 자칭 교양 있는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중심적으로 해석 및 전유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세 개로 쪼개져 버렸다: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관심 없는 대다수 사람.

이번에는 코미디다. 저마다의 유토피아가 각축전을 벌일 때, 결국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세력이 자신의 유토피아를 명시적 규율이나 암묵적 검열로서 관철한다. 힘을 가지면 정답도 가지게 되는 셈인데, 하나의 정답이 굳어진 채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어려워진다. 적어도 미학에서, 단일한 정답은 누군가에게 은밀하게 봉사하고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코미디가 대두된다. 코미디는 “위대한 예술을 위한 위대한 미학(242p)”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원리상 다원주의에 질색 팔색하게 되어있으므로,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행동의 복수적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허구적이고 테러리스트적인 기계에 불과하다. 이 생각은 사회 공간 속에서 집단들의 다양성을 부정하기 위한 시도들과 상관적이다(242p).” 따라서 “종교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위대한 예술의 코미디를 고발하는 것이다(242p).”

현대 미술의 본질은 다원주의에 있다. 다원주의는 “아주 어렵게 소통하거나 전혀 소통하지 않는, 분리된 판단의 장들이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생산되고, 그러한 공간을 생산한다는 것을 보는 것(151p)”이다. 이제는 온갖 선언서가 길바닥에 뿌려지던 시대가 끝났다. 울타리도, 강령도 없다. 그저 서로 다른 것들의 긴장감 넘치는 공존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과거 왕정 시대의, 혹은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스트의 비평적 논리들을 들이대는 순간 코미디가 시작된다.

“명백한 것은 예술은 확실히 미학적 의사소통의 원칙을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아무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불일치가 있을 때에는 누구도 누구를 설득시킬 수 없다. (중략) 미학적 공동체는 실제로는 하나의 대치이다.”

220p

세간의 우려와 달리, 예술에서 무제한에 가까운 다양성과 경쟁이 허용되는 상황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다만 이 경쟁이 너무나 고도화되면서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도달하고, 거기서 사회적/정치적 입장들과 완전히 괴리된 진공관 속의 미학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때는 문제가 된다. “그럴 경우 문화의 영역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은 오로지 쾌락, 여가, 그리고 내가 아직 잘 모르는 어떤 인간적인 이익들에만 관계될 것이다(237p).” 그게 진짜 예술의 위기다. 그것은 예술이 예술 자신만을 주목하고, 이야기하고, 비판하면서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세상이다. 인류 보편적 미술의 가치를 설파하는 공공단체나 현대 미술 반대론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그러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타락한 현대 미술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미술의 정체성이 이 사회의 거울에 가까운가, 아니면 사회악의 선두부대에 가까운가?

미학의 완전한 다원주의와 무정부 상태는 실보다 득이 많다. 그것은 거스를 수는 없다. 다양성 속에서도 얼마든지 창조와 소통은 가능하다. 성숙한 시민사회를 살아가는 교양인이라면, 단일한 비평적 원칙이 없다는 것, 하지만 예술 자체는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그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즉, 소통할 수는 있으나, 합의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 세상에는 개체 수만큼 다양한 욕망과 경험의 폭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언어 체계에 속하는 인간이기에, 소통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크고 우렁찬 목소리에 휩쓸리는만큼 진실은 더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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