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 1926~1984」

Didier Eribon, Michel Foucault, 1926-1984

미셸 푸코의 철학과 실천: 아버지의 이름을 버리고

푸코(Michel Foucault)의 신화는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온 아버지의 이름 ‘폴’을 스스로 거부한대서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또 하나의 ‘폴 푸코’가 되어야 했던 그는 자신이 증오했던 아버지의 이름인 ‘폴’을 버리고 어머니가 붙여 준 두 번째 이름 ‘미셸’을 선택했다. 청소년기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한 이 사건에서 푸코가 앞으로 살아갈 궤적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고등사범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평생의 과제는 이미 20대 중반에 공언되었다. 푸코는 “빼앗긴 자와 빼앗는 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51p).” 그에게 “철학적 사유란 끊임없는 실천이고, 철학 아닌 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43p)”이었다. 이러한 푸코의 사명을 이해한다면, 1967년에 푸코의 초빙으로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튀니스에 와서 ‘헤겔과 현대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면서 했던 다음의 농담은 그야말로 참말이다.

푸코: 오늘날의 모든 철학적 성찰은 헤겔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헤겔의 철학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현대철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폴리트: 초청자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푸코를 가르키며) 왜냐하면 현대철학은 바로 저기 앉아 있으니까요(314p).


작년부터 사상가들의 평전을 읽고 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벤야민(Walter Benjamin)에 이어 푸코로 넘어왔다. 이들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그리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는 굉장히 제한적이다. 그들은 태생부터 탁월한 지적 능력과 진지한 열의를 타고난 인물들이므로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성취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을 되짚는 과정은 마치 람보르기니의 극단적인 기계 미학을 입 벌리고 마냥 동경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것은 가질 수 없되 아름답고, 가질 수 없기에 아름답다. 따라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사상가의 평전을 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실상은 그저 ‘숭고미’라는 미학적 유희를 느끼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빚어낸 인간의 복잡한 내면, 그리고 인간을 품은 다층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분명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유익한 길잡이를 하기는 한다. 하지만 평전의 존재 가치가 단순히 길잡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평전은 그 자체로 문학적 재미를 선사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이지 흥미진진한 유희인데, 만약 그 타인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경우라면 그 지적 호기심은 상투적인 금기를 초월하여 강력한 면죄부를 얻는다.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사람의 모든 시시콜콜한 궤적을 하나하나 열람하고 거기에 주석을 달 권리를 갖고 있다. 그게 싫었다면 애초에 침묵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상가의 평전이 두 가지 역할, 즉 사상적 길잡이 역할과 내밀한 삶의 복잡한 맥락을 제시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면, 이 책은 전자의 역할에 좀 더 집중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푸코의 사생활이라고는 웁살라(Uppsala) 프랑스문화원장 재직 시절에 몇몇 지인들과의 에피소드와 캘리포니아에서 누렸던 성적 방종의 시간뿐이다. 반면 푸코가 매진했던 굵직한 연구, 저술, 정치적 행동과 관련한 분량은 여러 문헌, 인터뷰, 서신이 망라된 풍성한 아카이브다. 저자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은 푸코가 발기과정에 참여했던 독립언론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서 언론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푸코가 가장 많이 투고했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서도 근무하며 푸코와 사적·공적으로 인연을 맺어간 인물이다. 즉, 그는 푸코의 내밀한 사적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푸코의 공적 행적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푸코의 사적 삶에 초점을 맞춘 별도의 전기를 작업했기 때문이리라. 그 책은 이 평전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미셸 푸코와 그의 동시대인들」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된 바 없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결국 저자는 미셸 푸코의 사상적 업적을 조명한 평전과 사적 영역을 조명한 추가적인 저술로 프랑스 현대 사상계를 분석하는 이른바 ‘투 트랙’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쥐어진 선택지는 애석하게도 하나뿐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평전과 달리 시간 순서를 긴밀하게 따르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 저술, 주제에 오래 머무르며 그 사건과 관련한 전후 사정들을 모두 아우른다. 저자는 “그저 동시성이라는 끈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실들을 인위적으로 한데 묶기는 싫었기 때문(395p)”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한 인물을 둘러싼 중요한 사건의 의미와 복합적 역학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푸코가 내놓은 하나의 걸출한 작품이 누구로부터, 어떠한 비판과 찬사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맥락에서 푸코 자신의 평가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어서 상당히 유용하다.


저술

“왜 책을 쓰는지 아는가? 사랑받기 위해서야”

470p

“나의 모든 책들은 자그마한 연장통이다. 사람들이 권력 제도를 단락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 연장통의 뚜껑을 열고 마치 드라이버나 펜치를 찾듯이 거기서 어떤 문구, 어떤 관념, 어떤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나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다.”

392p

푸코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첫 번째 작품, 「광기와 비이성」은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대다수의 지적인 대중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체로 찬사일색이었다. 푸코의 박사학위청구논문으로 제출된 이 대작은 고전주의 시대의 견고한 합리주의적 변화과정에서 조용히 배제된 광인들을 추적하고, 그 분리 과정의 사회, 경제, 정치적 의미를 숙고하게 만든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푸코는 역사학자들이 밝혀 놓은, 다소 윤색된 시대정신의 근간을 한편으로 밀어 넣고 그 자신이 직접 발굴한 온갖 고문서와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서구사회가 거쳐온 지적 구조를 재구성했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분리하는 기준을 만들고 실제의 분리, 감시, 처벌에 당위성을 부여한 것은 실증적 과학을 가장한 인간과학이었으며, 그것이 생산성의 비약을 추구하는 정치권력과 결부된 과정을 낱낱이 밝혀냈다. 사람들이 광기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느꼈던 바는 광기의 판단, 분리, 감시, 처벌 등에 관한 과학적 이론과 제도에 무관하지 않으며, 그 정신구조는 오늘날까지도 서구사회의 사상적 기저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푸코는 광기라는 낙인으로 역사의 테두리 밖으로 사라져간 존재에서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역사철학적 고찰은 지금 이 순간에도 횡행하고 있을 분리와 처벌 기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이어진 대표작 「말과 사물」은 푸코에게 프랑스를 대표하는 젊은 지성이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굳혀준 명저지만, 그 명성에 걸맞는 논쟁을 야기한 문제작이기도 했다. 푸코는 전작보다 스케일을 넓혀 르네상스 이후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배적인 인식소를 짚어냈고, 인간과학이 그 체계와 결탁하고 상호작용했던 과정을 밝혔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아니라 구조들이나 언어의 체계 그 자체라는 점을 강조했던 푸코는 어느덧 사상계 주류로 부각되기 시작한 구조주의의 담론을 선도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맑시즘, 가톨릭, 실존주의자 등으로부터 오해와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맑시스트들은 이 새로운 사상이 사회의 모든 불합리를 구조의 탓으로 돌리고 개인의 혁명적 노력은 무위로 돌리지 않을까 우려하며 분개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도 푸코가 “부르주아 의식에 가장 좋은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고 있(294p)”다고 지적했다. 몇 년 후면 모두 오해로 밝혀질 그 모든 관심은 푸코의 작품이 지닌 폭발력 자체를 예증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나서 보여준 숱한 정치적 선언 및 행동에 비추어 본다면, 그가 지식의 고고학자가 되어 시대의 인식소를 파헤치고자 했던 의도는 분명하고도 진실하다. 그 의도란, 구조를 바꾸려면 우선 구조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를 만들어낸 앎과 권력의 교묘한 동행을 분간하지 못한다면 의미 있는 그 어떤 변화도 이끌어 낼 수가 없다. 푸코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념했던 「성의 역사」도 그러한 의도의 큰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작품으로, 오늘날 가장 첨예하고도 모호한 심급으로 남아 있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권력이 개인 및 공동체에 개입했던 과정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간 정신분석학, 심리학, 사회학이 성을 다루는 논지는 그것이 왜, 어떻게 구속되었고 금기시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푸코는 그 전제를 뒤집어 성을 말하고, 고백하고, 문제 삼도록 촉진한 통치술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즉, 성은 어떻게 주체와 동일시되었으며, 어떻게 인간과학과 정치제도의 통치 메커니즘에서 핵심 주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성은 규제되어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발설되도록 촉진되어왔다. “성은 역사의 산물이고, 그 역사 동안에 육체는 규격화 담론이 제공하는 일탈된 인식에 의해 자신을 혐오하며 스스로 분열되었다(619p).” 우리는 성적 일탈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인간과학과 위정자에게 통치 권한을 위임했다. 그 결과는 공공연한 감시와 처벌, 계층화와 위계화, 차별과 혐오, 그리고 만성화된 자기검열이다.


참여

“정부가 독점하고자 하는 현실 속에 개인들의 의지를 새겨 넣읍시다. 정부로부터 이 독점을 매일같이 조금씩 빼앗아 내야 하겠습니다.”

477p

서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에서는 저명한 철학자가 마치 셀럽처럼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주간지와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고, 마치 그것이 시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지식인 계층뿐만 아니라 필부필부도 정확히는 아닐지라도 어떤 사상가가 어떤 지향성을 보이는지 정도는 대략 알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철학자들은 심야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밀도 있는 학술서가 뜬금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철학자라는 집단 안에도 각계각층의 인간 부류가 혼재하는 만큼, 그들의 목소리가 기업가나 정치가들보다 세다고 해서 특별한 이점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돈이나 권세보다 지성적 사유가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폭넓은 공감대만큼은 무시 못 할 저력이다. 그 공감대는 그들 국가가 무수한 제국주의적 원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도 되는 마냥 행세하고 다니는 원동력 중 하나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68년 이후 무수한 성명서와 호소문에 서명하면서 저항세력의 좌장쯤으로 여겨졌던 배경에는 이런 문화적 저변이 있다. 심지어 데리다(Jacques Derrida)는 2002년에 개봉된 커비 딕(Kirby Dick)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사생활을 공개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장르 자체를 ‘해체’해 보이는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데리다만큼은 아니었지만, 푸코도 대중친화적인 행보를 보였고, 사회참여적 측면에서는 가장 선두에 있던 사상가다. 태생부터 ‘좌익 부르주아’였던 그는 소싯적 정의감에 사로잡혀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맑시스트 특유의 당파성과 편협함에 질려 이내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였고, 그 정체성은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웁살라, 헝가리, 함부르크에서 프랑스 문화원장으로 일하던 청년기나 소도시의 교수로서 첫발을 떼던 당시에는 제도권 정치에 줄을 대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난 후에는 신념에 따라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성명서와 호소문에 서명하고, 광장에서 행진하고, 공공기관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선두에 섰던 장면들은 프랑스 시민사회 전반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푸코의 사회참여에서 두드러진 관심은 역시나 사회에서 소외된 광인, 노동자, 수감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데 있었고, 그 관심의 지평은 국경을 초월하였다. 이러한 거침없는 행보는 구조주의자들이 반동적이라는 비난을 단번에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그를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강력추천했던 쥘 뷔유맹(Jules Vuillemin)에게는 아찔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426p).

사회운동가적 측면 외에, 학문적인 면만 놓고 보면 사실 그는 대중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의 특출난 사상적 궤적이 그를 유난히 돋보이게 만들어 주어서 결과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이다. 「말과 사물」이 출간되었을 당시 서점가에서는 찍어내기 바쁘게 팔려나갔고, 대부분의 언론매체는 이 책에 대한 찬반의 반응으로 도배가 되었다. 평소에 철학, 심리학, 역사, 언어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조차 이 책을 들고 바캉스에 나섰으며, 최소한 이 뜨거운 논쟁에 대하여 관심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테이블 한편에 이 책을 올려두기도 했다. 지식층의 진지한 지적 열의와 관심을 기대했던 푸코로서는 당혹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는 이 책에 달라붙은 찬반의 목소리들, 특히 자신을 우익 앞잡이로 간주하는 오해들에 맞서 최대한 변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환멸감을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때 「말과 사물」의 개정판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왜 책을 쓰는지 아는가? 사랑받기 위해서야(470p)”라는 진술에서 보듯, 푸코는 읽히지 않기 위해 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공격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라도 그럴 것이다.

사회참여에 관한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도 푸코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저술의 제목이기도 한 「감시와 처벌」이다. 사법적 권한으로 범죄자나 비정상인을 구분하고 그들을 격리하는 방법 및 체계를 변혁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가 지녔던 사법적 활동에 대한 견지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어서, 현존하는 모든 공권력 및 인간과학의 결부 자체를 전복하고 무효화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수준이었다. 각종 시위 현장에서의 목소리, 감옥정보그룹의 창설과 활동, 리베라시옹의 설립 등은 모두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모든 사법체계가 전복된 이후의 무정부 상태에 대한 대안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아마 푸코는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그는 지금의 체계가 이루어진 근본적인 배경과 과정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판을 짜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의 합리성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합리성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근거가 결코 과학적으로 구성된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80p).” 이것이 푸코가 밝힌 본원적 질문의 필요성이다. 물론 그가 살아생전 건강했고, 오래 살았고, 적절한 책임을 부여받았다면 그는 사법체계를 개혁하는 책임을 누구보다 잘 완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문화원장 시절, 그리고 교육 분야의 제도권 행정에 몸담았던 경력을 감안할 때, 이론과 실무적 행정을 푸코만큼 동시에 잘 다루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웁살라 프랑스문화원장 시절의 지역 신문 인터뷰 기사

푸코가 생각한 사법적 정의의 이상적 구조가 실현되지 않았던 까닭은 정치권력을 지닌 그 누구도 그에게 적절한 기회와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과 같은 견해일 때에만 내게 말할 권리를 준다(529p).”는 푸코의 말에는 현실정치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지식인의 비애가 담겨 있다. 그는 말과 생각이 특정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근거 정도로 치부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예나 지금이나 듣고 싶은 말에만 열려 있는 귀가 문제다.

“지식인이란 모든 권력에게 있어서 ‘더러운 종족’에 속한다(440p).”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스스로가 그 누구에게도 더러운 종족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지식인이 아닐 것이다. 모두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 때, 스스로 마음의 부담은 덜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푸코가 오늘날 단순한 한 명의 사상가를 넘어 신화적 인물로 기억되는 까닭은 그가 진영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더러운 종족’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알았으며, 또 기꺼이 그러한 대접을 감당해낼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도권 마르크스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으나, 분명 좌파적인 실천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좌파 정부가 들어섰을 때 가장 열렬하게 광장으로 나섰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비판과 협력은 사실상 동의어였다: “한 정부에 협력하여 일하는 것은 전면적인 수락이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협력하면서 동시에 비협조적일 수도 있다. 그 두 가지가 짝을 이룬다고까지 나는 생각한다(512p).” 극단화된 우리의 정치생태계, 그리고 그 극단화를 자양분으로 삼아 각 대선후보 캠프에서 기생하는 교수 집단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호적 관리의 도덕일 뿐이다. 그 도덕은 우리의 서류를 지배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만은 우리를 제발 좀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307p).” 저자를 일관성과 정체성에 붙들어 매는 것은 진리로부터는 절연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진리는 유동한다. 그리고 실천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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