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천 마디 말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이 증거로서 기능하려면 천 마디 말의 뒷받침이 필요한 것이다.”
293p
우리나라에서 기계비평의 시작을 알린 저작이다. 저자는 기계를 향한 남다른 애정으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내 테크놀로지를 저버리고 대학원 미학과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때 하이데거에게 빠져서 그간 애지중지했던 기계 모형(프라모델) 컬렉션을 박살 내버리기도 했지만, 이내 사진비평을 경유하여 마침내 ‘기계비평’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거창하게 개척이라는 말을 붙였지만, 이 분야가 주류 비평계에서 공공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저자도 작은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기계비평이라는 화두를 처음 던진 이 책이 2006년에 출판된 이래, 관련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던가 대학 강의가 개설되는 등 소소한 성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면 성공이라고 봄직도 하다.
기계비평은 기계에 담긴 역사, 미학, 문화를 사유하고 의미를 도출하여 비평적 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 기계비평이 활발하게 전개될 적시라고 보고 있는데, 왜냐하면 기계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을 관조할만한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계문명의 한복판에서 진화의 가속도에 몸을 맡기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충분한 사유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구조 안에서는 구조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 기계문명의 시대에서 소프트웨어의 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자동차를 동력장치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는 움직이는 전자장비에 가까워졌다. 이처럼 전방위적 디지털 전환의 물결 속에서 센서와 지능형 프로세서의 통제를 벗어난 기계장치들은 어느새 근대사회의 유물로 간주된다. 이제 기계의 동시대적 영향력으로부터 약간 빗겨서 그것을 둘러싼 역사와 미학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가 근대의 유물로 돌아서기 시작한 지금이 기계미학을 전개할 적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기계를 향한 넘치는 애정으로 거대한 컨테이너선을 타고 세계를 유랑하기도 하고, 디젤기관차에 동승하기도 하고, KLM의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를 며칠 동안이고 뒤적거리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먹고 사는 문제와 상관없는 개인적 흥미의 발현인 듯 자연스럽고 의욕적이다.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행복한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퍼즐 하나를 완성한 셈이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비평은 다분히 편파적이고 정치적인데, 우리는 이러한 비평에 본능적으로 끌리기 마련이다. 그 내용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영준의 기계비평에는 자의식 과잉이나 현학적 태도가 없다. 저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비평이기에 읽는 재미가 있다.
저자의 모든 비평을 관통하는 주제는 이원적 구조다. 눈에 보이는 것과 감춰진 것. 그것이 기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쟁점이다. 기차는 승객들에게 보이는 안락한 좌석과 보이지 않는 육중한 동력장치로 이원화되어 있다. 관광지나 공항은 여행객을 환대하지만, 거기서 약간 떨어져 있는 컨테이너 항구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도 없다. 사진은 피사체의 실체적 진실을 보여준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미지의 세부 조건들을 구성하는 것은 사진에 드러나지 않은 카메라와 온갖 부수적 장치들, 그리고 사진사의 존재다. 비평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개입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언어로 번역한다.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역과 독자 사이에 가교가 된다. 이것이 저자가 규정한 기계비평가로서의 사명이다. 그런데 이 사명은 일반적인 예술비평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비평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작품을 둘러싼 다층적인 의미작용을 촉발한다. 작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의미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이영준의 기계비평이 증명한 것은 비평의 본질이 어느 대상에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며, 그렇게 비평의 지경을 확장하는 작업이 절대 헛수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기계를 둘러싼 사유와 담론이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빈약한 현실에 개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빈약한 현실 속에서 선구자라는 아우라 하나를 덧입고 모종의 덕을 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유가 부족한 이유다. 우리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거치는 과정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 없는 모든 실천에 대하여 헛짓으로 치부하는 압력 속에 살아왔고, 이러한 가치관은 견고한 사회문화적 구조 속에서 암묵적으로 계승되는 탓에 충분한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도 쉽사리 소멸하지 않는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볼 때도 되었다.
인간이 효용을 위하여 만들어낸 모든 물건과 제도는 나름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지니며 동시대 인류와 독자적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그 역동적인 의미작용을 규명하고 해석하는 일은 그것의 창조자인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기에 덤벼들 가치가 충분하다.
이제 숙제는 나만의 ‘OO비평’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