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스펄링, 「우리 시대의 작가: 존 버거의 생애와 작업」

Joshua Sperling, A Writer of Our Time: The Life and Work of John Berger

이야기꾼의 시대는 끝났나?

주인공의 이름은 부제에 숨었다.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들어가곤 하는 초상사진도 없다. 주인공의 첫 번째 소설 제목을 딴 ‘우리 시대의 작가’라는 찬사만이 전면에 드러났다. 새삼 그가 우리와 동시대에 함께했음이 실감 난다. 동시에 그가 벌써 평전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난 것인지 도무지 실감이 안 난다.

사후 3년만에 나온 첫 평전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일단락된 궤적으로 간주한 채 역사의 축에 밀어 넣고 가타부타 논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평전 작업에 빠르게 착수하면 풍부하고 생생한 자료에 접근하기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주인공과 동고동락했던 가족, 동료, 친구들의 증언은 오직 동시대에만 온전히 취합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다. 지인들이 살아 있다는 점은 암묵적이거나 의도된 검열의 우려를 내포한다. 주인공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부당한 신화화나 평가절하로 이어질 위험성도 있다. 저술 당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료가 뒤늦게 발견되어 중요한 진술이나 평가가 차후에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조슈아 스펄링(Joshua Sperling)의 평전도 이러한 우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부제는 ‘생애와 작업’이지만 사실상 ‘생애’는 없다고 보면 된다. 이 책만 읽고서는 버거(John Berger)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나고 자라면서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학교생활이나 연애관계는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바가 거의 없다. 버거가 성인이 되기 전 시기에 대해서는 서문에서 4페이지 정도 다루는 것이 전부다. 나도 평전을 꽤 읽은 편인데, 출생 시점과 장소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처음이다. 물론 위대한 인물의 출생 자체를 사건화하면서 마치 역사적 분기점으로 보는 듯한 신화화는 정말 별로지만, 그래도 어떠한 배경에서 나고 자랐는지조차 알 수 없다면 평전을 읽는 중요한 의미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인 이후의 사적인 삶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책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은 버거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의미, 영향력 등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버거의 대표작들의 숨은 의미를 꼼꼼히 풀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가이드, 혹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 삶과 작품이 나란히 발맞춰 간다고 본다면, 이 책은 거의 반쪽만 다루고 있는 셈이다. 제1장에서 이미 20대 중반이 된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저술 활동과 관련이 없는 사적인 인맥이나 생활습성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 없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부모 다음으로 배우자일 텐데, 연애 과정에 대한 기술도 하나 없이 바로 누군가와 결혼했다는 진술이 등장하니 독자로서는 당황스럽다. 마치 연애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던 형제가 저녁 식탁에서 대뜸 장가간다고 청첩장을 들이미는 꼴이다.

저자는 도입부에서 “전통적으로 전기가 담당하는 사사로운 영역을 지나치게 깊게 파고들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전제해 두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깊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 아예 파고들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한 적 없다. 버거는 성인이 되어 미술공부를 마치자마자 동급생인 팻 매리엇(Pat Marriot)과 결혼했지만, 얼마 안 가 이혼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비평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스무 살 연상의 전 남작부인 로즈메리 게스트(Rosemary Guest)와 재혼했다. 이러한 행보는 주인공이 속한 시공간적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대단히 파격적인지라 놀랍고 궁금증을 자아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입을 다문다. 매리엇에 대한 서술은 3줄이 전부다. 게스트와의 재혼에 대해서도 “믿기지 않게도”라는 평을 남겼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믿을 수 없는지, 어떠한 배경에서 그러한 결정이 이루어졌는지, 버거의 생애에 걸쳐 어떠한 기억으로 남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우리는 그냥 믿기지 않는다고 믿으면 된다.

결국 저자가 입을 다문 대목은 버거의 여자관계다. 청년기의 우발적인 만남에 가까웠던 패리엇과 게스트, 전성기 삶과 작품에서 상당한 지분을 공유한 애나 보스톡(Anna Bostock), 오트사부아주 산골짜기까지 주인공을 따라갔고 버거의 여인 중 유일하게 이 책에 사진이 실린 베벌리 밴크로프트(Beverly Bancroft),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의 얼굴, 내 가슴」을 헌정한 넬라 비엘스키(Nella Bielski)까지, 많은 만남과 갈등 속에서 주인공이 성장하고 변화한 과정이 있을 테지만, 저자는 모종의 이유로 그것에 대해 입을 다문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침묵을 강요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거짓이 또 하나의 거짓을 낳듯, 침묵도 또 하나의 침묵을 낳는다. 여자관계에 대해서 입을 다물려다 보니, 그 관계에 같이 얽혀 있는 다른 지인이나 사적인 생활습관, 그리고 사소한 태도까지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평전은 작품의 의미를 밝히려는 지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쪽짜리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선택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버거가 택한 삶의 모순을 구체적 형상이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주인공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 첫째요, 버거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그의 후손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기에 그들의 명예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둘째다. 둘째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어쨌든 이 평전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세상에 나온 결과물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

버거는 늘 남들과 다르게 봤다.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Ways of Seeing」은 우리나라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과도하게 의역되었는데, 버거의 인생 자체에 의역된 제목을 대입해본다면 거의 직역에 가깝다. 추상표현주의가 뉴욕의 자본가들에 의하여 강매될 때, 자본이 예술을 잠식하는 흐름을 읽었다. 범접할 수 없는 미술사의 고전조차 신비화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의 표상에 불과함을 지적했다. 새로운 조류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나 보이더라도, 그것을 진영 안으로 포용할 방법에 대하여 고민했다. 식자들이 이데올로기를 외치며 두꺼운 이론서를 내놓을 때 대중의 삶 속에서 작은 변화들을 재촉할 영화제작을 선택했다. 혁명의 희망이 사라져버린 조국을 과감하게 버렸고, 무분별한 확장일로의 도시 경계 밖에 놓인 농민과 이주민의 곁에 섰다. 단순히 곁에 서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그 어떤 대의명분이나 정치적 노선보다 사랑과 연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안주하는 법이 없었던 버거의 일생에 단 두 개의 불변하는 주제를 꼽자면 그것은 예술과 연대였다.

버거에게 삶, 예술, 혁명은 무엇하나 동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나란히 간다. 전쟁이 끝나고 혁명에 대한 기대가 활활 타오르던 시기에는 예술이 혁명을 위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리얼리즘을 확고하게 옹호하면서 언제든 투사로 돌변해 최전방에 섰다. 지역적 맥락과 구체적인 삶의 흔적을 지우고, 천재의 내면으로만 깊숙이 파고드는 모더니즘 회화는 결국 ‘자본-권력’과 결탁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거침없이 공격했다. 하지만 버거는 외골수의 투사가 절대 아니었다. 진리란 일견 모순적이거나 유동적일 수 있으며, 때로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혁명의 동지들이 예술가를 혁명의 도구로만 굴복시키려 할 때, 버거는 그 길이 잘못됐음을 알았고, 배신자로 낙인을 감수하면서까지 입체주의를 옹호했다. 중요한 것은 표현방식이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메시지와 진정성이었다. 그 대목에서 버거는 혁명을 위한 예술이 아닌,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예술을 확고한 중심에 놓고 평생의 과업을 이어갔다.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판사가 되기보다는 작품에서 끝없이 재창조되는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이야기꾼이 되어 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늘 이야기에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화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랬고요. 미술비평가로 일하면서 항상 이야기꾼의 접근 방식으로 미술을 대했습니다.”

106p

이야기꾼은 혁명가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혁명에는 실패가 있고,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이야기는 좀처럼 실패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저 먼 지평으로 나아간다. 이야기는 스스로 살을 붙여 다시 태어나고 작은 움직임들을 이끈다. 그렇게 본다면 이야기는 혁명의 다른 이름이다. 이야기라는 범주에서 보면, 버거의 혁명도 마냥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비평, 소설, 영화, 에세이, 시를 넘나들며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이야기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이 세상의 속절없는 타락을 얼마나 늦췄는지, 혹은 그 타락 가운데에서도 버틸 힘을 얼마나 힘차게 우리에게 불어넣어 줬는지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은 저마다 그 세계와의 어떤 관계를 암시하며, 모든 관계는 행동을 암시한다.”

319p

그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꾼의 시대도 함께 막을 내린 듯하다. 그 어떤 훌륭한 이야기도 견고한 벽을 좀처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파편화된 충격과 자극만이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터져 나오다가 금세 휘발된다. 자극의 역치는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인내심은 그 어떤 지하자원보다도 빨리 고갈된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은 분명 존재하리라 믿는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예술, 연대, 그리고 변화의 이야기가 어떻게든 나름의 발화자와 회선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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