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의 「삶이 축제가 된다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교수의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 두 번째 편이다. 첫 번째는 로마였고, 이번에는 베네치아, 세 번째는 역시 피렌체다. 이번 편만 제목 짓는 방식이 좀 다르다. 도시명이 표제에서 빠졌다. 이런 식이라면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할 때 다소 손해를 보겠는걸? “축제”라는 단어 자체를 그대로 “베네치아”와 등치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구성은 전작과 같다. 장소 하나를 정해 놓고, 거기에 얽혀 있는 역사, 예술, 철학, 신화 등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로마 편에서도 말했지만, 이분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간다면 아마 한시도 지루할 틈은 없을 것 같다. 유익한 TMI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샘 솟는다.

이번에 저자가 베네치아에서 주목한 키워드는 축제다. 여기서 축제란 단지 한해 중 며칠에 걸친 일회적인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 전반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지리멸렬한 하루하루의 먹고사는 문제,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희열을 간절하게 희구하면서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언젠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생의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행복하게 즐기지 못했던 시간을 후회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정해져 있다. “No Day But Today”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기도 버거울 만큼 시대의 파도가 쉴 새 없이 휘몰아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베네치아로 가야 한다. 왜 하필 베네치아인가? 아드리아 해의 찬란한 햇살이 수면에 황금빛 물결을 빚어내는 그 천년의 도시는 신이 길흉화복의 모든 운명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 시절에도 화려하고 세속적인 가치들로 반짝거렸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가 그린 눈부신 비단결의 옷 주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안정적인 농업은 꿈도 못 꾸고, 전염병에 유난히도 취약했으며, 동서 문화의 가교역할을 했던 이 도시는 당대 모든 이질적인 문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으며, 그 모든 문화를 뒤섞어 현재를 즐기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갯벌 위에 수천, 수만 개의 말뚝을 박아 성당과 저택을 지었던 베네치아 시민들은 아무리 단단한 성채라도 언젠가 물에 잠기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어찌 현재를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 위에 산다는 것은 늘 거울에 둘러싸여 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집을 나서고 들어오는 일상의 모든 발걸음 가운데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나는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는가?”

베네치아 가기 전에 읽으면 좋을 책이지만, 다녀오고 4년이 지난 뒤에야 이 책을 읽었다. 리알토 다리 밑에서 올라오던 물비린내도, 카페 난간에 앉아 있던 갈매기의 무심한 뒷덜미도 이제는 아련하다. 그래도 한번은 거기 머물러 봤음에 안도한다. 내가 죽기 전에 해수면의 상승이 베네치아를 덮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가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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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를 축제와 연결한 도식에서 나는 비약의 사다리를 타고 이태원을 떠올렸다. 10.29.의 비극을 만들어낸 복합적 원인 중 하나로 디오니소스의 부재를 생각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우리 삶과 예술을 지배하는 두 가지 유형의 충동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대조시켰다. 아폴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차가운 반면, 디오니소스는 격정적이고 원초적이고 자아도취적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개인에게나, 집단에나, 혹은 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에나 상호 견제와 양보 속에 건전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게 건전한 개인이고, 건전한 사회다. 그런데 유독 이 사회에서 디오니소스가 발을 디딜 영토는 너무나 협소하다. 고도의 압축성장 과정을 거치며 발전, 개발, 생산 등으로 대변되는 양적 경제성장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잉여적 가치들은 철저히 묵살되어 버렸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결코 죽는 법이 없다. 늘 우리의 내면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고서 언젠가 날개를 펼 때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작은 계기만 형성돼도 억눌렸던 디오니소스적 열망이 특정한 시공간에 집약적으로 분출된다. 아주 오래 묵혀뒀던 치약을 힘줘서 짜는 것처럼 팍하고 터져버리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청춘들을 강제 혹은 반강제적으로 학교, 학원, 도서관, 스터디카페, 그리고 일반적인 카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스터디카페로 빙빙 돌리기만 하는 사회에서 디오니소스들은 다 죽었을까? 아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눈만 희번덕거리고 있다. 그 디오니소스들을 목격하고 싶다면 학원가 한복판에 있는 코인노래방으로 가서 복도에 한 10분쯤 우두거니 서 있어보라. 그곳이 억눌렸던 디오니소스들의 처절한 악다구니가 펼쳐지는 짧지만 강렬한 축제의 현장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집약적으로만 활개를 쳐야 하는 것일까? 이 사회가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줄 수 있는 견고한 무대는 없는 것일까? 모든 신분제의 금기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던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현재와 조금은 다른 삶의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꿈꿀 기회 정도는 열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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