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스푸너의 「다크컬처」

Catherine Spooner, Contemporary Gothic

오늘날의 유령은 어디에?

헌책방의 진정한 의미는 책값의 절약 같은 단편적인 효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의외성의 미학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쿰쿰한 서고가 천장까지 닿아 있고, 누리끼리한 책들은 책장에서 미어져 나와 복도까지 장악한다. 사람의 공간에 책을 둔 것이 아니라 책의 공간에 사람이 제멋대로 침입해 굽이굽이 유랑하는 맛이다. 책들은 못내 겨우 사람 하나 비집고 들어올 관용을 베풀어 준다. 눈높이에도 좋은 책이 많건만, 꼭 고약스럽게도 저 너머에 손 닿지 않는 곳에 낑겨진 책을 굳이 뒤적거리고 싶다. 책들로 뒤덮여 안 보이는 저 뒤편에도 보석이 웅크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헌책방에서 만난 책은 사실상 ‘새책방’에서라면 전혀 마주하지 않았을 그런 책이다. 우리는 헌책방을 서성이다가 꼬장꼬장한 주인장과 눈이 마주칠 때 겸연쩍은 눈인사를 건내며 뭐가 됐건 무조건 한 권 이상은 사 들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사실 그런 압박감을 느끼려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제한된 선택의 여지 속에서 만난 책은 의외의 보석일 수도 있고, 헌책방에 흘러 들어간 모종의 사유가 두세 페이지 만에 확인될 때도 있다. 어쨌든 새책방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의외성의 선택을 통해, 즉 일종의 ‘약한 연결을 통해 사고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헌책방이다.

홍대 근처 유서깊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비롯해 몇몇 친구들을 데려왔다. 제목을 보고 도판들을 대충 훑어봤을 때는 이 시대의 어두운 시각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나 비평이 담겼겠거니 생각해서 구미가 당겼다. 예상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 다크한 고딕 문화의 간략한 역사적 흐름과 현시대의 잔재들, 그리고 비평적 의미들이 담겨 있기는 하다. 그런데 너무 영미권 대중문화에 완전히 초점을 맞춘 서술이라 그 텍스트에 대한 맥락적 정보가 전혀 없는 나에게는 행간으로 깊숙이 들어간 비평적 읽기 자체가 무용했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수지 수(Siouxsie Sioux), 「미녀와 뱀파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 리빙 데드 돌(Living Dead Dolls)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네 가지를 모두 안다면 저자의 풀이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딱 하나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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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를 모르더라도 저자가 전해주는 고딕 문화의 일반론과 비평적 의미는 새겨 둘 만하다.

고딕은 어두운 것, 이교도적인 것, 죽음, 공포, 낯섦, 차가움, 음침함 등을 아우른다. 이러한 고딕은 귀향과 귀환이라는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18p). 망자가 육신을 입어 돌아오고, 폐가가 된 고향으로 돌아오고, 끝나버린 운명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고딕은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데, 여기서 목적지는 실제로 우리가 한때 거쳐 간 곳일 수도 있지만, 억지로 강요된 고향일 수도 있다. 또한, 고딕은 감금이다(26p). 오래된 성에 갇히고, 폐가에 갇히고, 벽장에 갇히고, 저주받은 육체에 갇힌다. 감금은 탈출이라는 숙명으로 이어진다. 현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지구상에 없을 텐데, 고딕은 그 욕망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

고딕의 수용은 계층화되는 경향이 있다. 고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장 표면에 내세우는 장르인데, 이것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실존적 삶에서 죽음의 위협을 덜 느끼는 사람들이다(27p). 물론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전복적 희망을 품고 도피처로서 고딕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러한 즐김은 자못 처절하고 음지에만 머무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딕에 동일시되는 정도는 아마도 계층적 증표가 될 수도 있다.

고딕은 타자가 두드러지는 장르이다(29p). 인류 역사에서 한때는 옆 부족, 이교도, 피부색이 다른 자, 심지어 여성이 타자의 역할을 맡았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누군가를 악마화하고 적으로서 매체에 등장시키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 고딕에서 두려움을 몰고다니는 자는 당대 수용자들이 누구를 타자로 정의하고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이들 타자는 그 자체로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대게는 정치적 이유로 위험한 정체성을 덧입은 자들이었다.

변형은 고딕의 주된 모티브다.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탈바꿈한다. 공포물에서 신체변형은 단골 소재인데, 10대들이 유독 공포물에 끌리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급격한 신체변형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149p).

오늘날 고딕은 음울한 다락방에서 기어 나와 상품화되고 있다. 사실 고딕이 음지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계기는 계몽주의였다(34p). 그전까지 고딕은 여전히 굳건한 신의 지위와 함께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비극을 몰아내기 위해 마녀를 사냥하고, 재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고, 불길한 동물과 인물을 음지로 내쫓는 등 모든 금기와 관습은 고딕적 전설들이 실제라고 굳건히 믿었기에 가능했다. 계몽주의가 유령을 현실에서 끌어내린 순간, 고딕은 순수한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었다. 이 점은 부르주아가 고딕을 먼저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거대 미디어 공룡, 그리고 광고업계와 손을 잡은 동시대의 고딕은 외형과 모티브만을 원전에서 탈취한 후 건전한 콘텐츠로 재정립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장르적 정체성과 교감한다(195p). 자본은 고딕의 매력적인 요소들만 선별하여 시장에 내다 판다. 이때 고딕은 진부화되지만 그럼으로써 고딕의 진짜 속성이 드러난다. 즉, 고딕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219p).

고딕이 필요 없는 사람은 딱 한 부류 뿐이다. 삶 자체가 지옥이 된 사람들이다. 고딕은 이처럼 삶의 조건을 드러내게 하므로 정치적이다(221p). 인류 역사상 위대한 혁명의 순간들은 고딕적 격동의 장면들로 기억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대상으로 공포를 느낀다는 것, 전율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존의 조건을 상기시킨다. 고딕은 유령처럼 낯설고, 유령이란 원래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교란하는 자들이다. 유령을 통해 나 자신과 사회를 비평적으로 되돌아볼 계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딕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녔다는 증거다(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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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니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유독 다크컬처가 없다는 느낌이다. 고딕이 주류 미디어에서 흥행에 성공한 사례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역자는 20세기 말의 검붉고 매트한 립스틱, 그리고 「안녕, 프란체스카」 정도를 예로 들었는데, 내 인식의 지평도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약 10년 전쯤 잠깐 스치고 지나간 스모키 화장 정도가 그 후예가 될까?

저자가 인용한 데이비드 펀터(David Punter)의 말대로, 한 시대의 종언을 암시하는 세기말적 불안은 분명히 고딕을 소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31p). 나도 20세기 말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때의 고딕적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제목부터 「세기말(1999)」이었던 그 영화, 엽기 코드, 몽환적 엑스터시로 빠지는 테크노 댄스… 당시에는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도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던 시민들에게 테크노 댄스를 버젓이 종용하곤 했다. 에일리언 컨셉의 노래방은 또 어떻고…

그 많던 고딕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지나치게 정숙함과 아폴론적 이성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가 가죽자켓과 스모키 아이라인을 벗어던지게 만든 것일까?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삶 자체가 죽음과 맞닿아 있어서 유희로서 즐기는 고딕은 사치가 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유령마저 69시간 격무에 시달리다 과로사로 쓰러진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삶의 팍팍함이 무대 위에 올라온 고딕을 끌어내린 측면은 분명히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당장 취업을 하려면 언제 어디서나 좋은 평판을 유지해야 하고, 하다못해 면접이라도 볼라치면 말 잘 듣게 생긴 똘망똘망한 외형을 어필해야 하는데 언제 별도로 시간을 내 고스족이 되어 거리를 휘젓고 다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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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최근에 즐겼던 고스문화의 아류도 6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1월에 메탈리카 내한공연이 있었고, 그때 오프닝 공연으로 베비메탈(BABYMETAL)이 무대에 올랐다. 고스족-메탈밴드 컨셉의 아이돌 걸그룹이라니… 생소하고도 신선한 컨셉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나는 내한공연 후기의 마지막 단락을 아래와 같이 베비메탈에게 헌사했다.

사실 이번 공연에 앞서 메탈리카보다 베비메탈을 더 많이 예습하고 간 것 같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메탈+아이돌의 조합은 처음의 맹목적인 거부감이 무색할 정도로 묘한 중독성을 선사하였다. 특히 SU-METAL의 보컬은 진정으로 칭찬할만 하다. ‘일본 여성 보컬리스트’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청아하고 맑은, 어떠한 색채도 가미할 수 있을 것 같은 순수한 보컬에 힘과 감성도 균형감 있게 배어있다. 결과적으로 그 보이스에 메탈이 입혀질 것이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었겠지만, 귀여움을 담당하는 나머지 멤버들과의 합에 의하여 진지함과 키치를 적절히 오가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성공적으로 개척해냈다. 특히 과거 엑스재팬을 연상케 하는 일본 락 특유의 감성적 멜로디는 나로 하여금 알싸한 추억에 젖게 했으며, 적어도 락에 있어서 만큼은 일본이 얼마나 앞선 성취들을 이루어왔었는지를 다시 상기시켰다. 지금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발자취를 세계 곳곳에 아로새기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그녀들의 행보가 기대된다.

2017.1.

최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찾아보니 그새 멤버가 두 명으로 줄었고, 활동도 예전만 못한 모양이다. 내 응원이 무색하다. K팝이 성장했다지만 다양성 면에서는 늘 의문이 남는다. 이런 파격적인 컨셉은 보기 힘들다. 요즘 지상파 음악방송을 참을성 있게 지켜볼라치면 앞서 나왔던 친구들이 줄줄이 뒤이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고, 또 그 시도를 응원해줄 수 있는 시장이 있어야 건전한 문화 생태계가 된다. 아직 세기말은 멀었지만, 유령은 아직 구천을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줄 누군가가 나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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