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Crary, Suspensions of Perception: Attention, Spectacle, and Modern Culture
“19세기 말 이후 제도적 권력에서 중요한 문제는 생산적이면서 관리와 예측이 가능하고 사회적으로 통합될 수 있으며 적응 가능한 주체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지각이 기능하는 것뿐이다.”
17p
“주의는 다양한 사회적-기계적 기계들에 부합되는 주체를 생산하는 데 줄곧 필수적 역할을 해왔다.”
137p

억측의 향연, 억측의 맥락
‘우리 시대의 고전 27’ – 문학과지성사가 전개하는 시리즈인데, 참 시리즈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니! 누구나 인정할만한 좋은 책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누구라도 곱씹어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책을 고전으로 비준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시간이다. 고전은 개념상 동시대성과 한 틀에 묶일 수 없다. 출판사는 개념적 모순을 뚫고 이 책을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옹립하면서 저자의 주장과 해석에 강력한 힘을 실어 주었다. 이로써 나의 반발심은 더욱 증폭된다.
저자 조너선 크레리(Jonathan Crary)는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서 주의(attention)가 시각문화 및 경제활동의 중심 주제였음을 논증한다. 그가 주의 문제를 꺼내기 위해 주목하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제한된 기간이며, 장소도 프랑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그 시공간이 서구 근대성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구체적으로 마네의 <온실에서(1879)>, 쇠라의 <서커스 선전 공연(1887-1888)>, 세잔의 <소나무와 바위(1900)>가 논의를 이끄는 세 개의 분기점이다. 저자는 이 작품들의 사회경제적 맥락과 시각적 단서를 하나하나 집요하게 짚으며 주의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나간다. 이를 통해 주의 개념이 미학, 철학, 심리학 등 학제 분야를 막론하고 어떻게 진지한 학술적 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파생된 새로운 발견들이 어떻게 구체적 사물과 제도로 녹아들었는지, 특히 근대의 새로운 산업구조가 주의분산과 주의집중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생산 및 소비의 도구로 활용했는지를 밝힌다.
부제에 언급된 ‘스펙터클’은 근대의 주의 문제를 돌이켜보면서 저자가 주목한 핵심어이다. 스펙터클은 산업자본이 무언가를 보도록 강요하기 위해 주로 구사하는 전략이다. 스펙터클은 일단 주의를 끈다. 그것은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집단 속의 구성원이었던 누군가를 원자화된 개인 그 자체로 끌어 내린다. 개인을 무기력하게 분리시켜 유구한 시간 속에 밀어 넣고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든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자장 속에서 우리의 주의력은 상실되고 주체성마저 분열된다. 근대로부터 이어진, 아니 그 후로 줄곧 강화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주의력 관리 시스템이라는 조건 아래, 우리는 주의의 문제에서만큼은 주체성의 아주 작은 귀퉁이만을 움켜쥔 채 근근이 살아간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던 20세기 말이 주의력이 상실된 사회적 위기의 시기라고 진단했는데, SNS 및 숏폼 중독에 뇌가 절여진 좀비들이 온 사방을 휩쓸고 다니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진단은 참으로 성급했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근대의 급격한 기술적·학문적 진보가 주의를 둘러싼 새로운 지적 발견들을 낳고, 그 지식이 자본주의 성장연합체의 도구로 활용되어 전략적 주의분산 및 주의집중의 모델로 이어졌다는 이 책의 핵심적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아니, 뒷받침하는 정도를 넘어서 주장 자체를 뒤덮을 정도로) 치밀한 문헌조사와 실례들은 분명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반감을 품게 하는 요소는 앞서 말한 세 개의 핵심적 작품을 논의의 모티브로 삼는 방식이다.
저자는 각 작품의 표면에서 이전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당대만의 새로운 주의의 시각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림의 어떤 개체, 표현, 구도 따위가 주의분산의 모델을 투영하고 있거나 스펙터클의 기술을 암시한다는 식이다. 때로는 화가의 개인사, 관심사, 언행 등과 결부하여 자기 해석에 논리적 정당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작품 해석에는 한계가 없으며, 한 권의 책에 작품 해석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저자 고유의 권한이다. 우리는 그저 그 해석의 논리성, 진실성, 설득력에 관해 몇 마디라도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나의 평소 지론은 무한대에 가까운 해석과 비평의 자유를 통해 ‘저자의 죽음’이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고 미적 담론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정말 끝도 없이 간다. 가뜩이나 끝없이 휘몰아치는 인용의 거센 파도 속에 꾸역꾸역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 책을 이렇게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이지 ‘억측의 향연’이라고. 살다살다 작품 하나에서 이렇게 많은 억측을 뽑아내는 책은 처음 봤다.

본격적으로 작품론이 시작되는 제2장의 초입에서부터 억측의 향연이 펼쳐진다. 마네(Édouard Manet)의 <발코니(1868)>에서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세 인물이 “근대적인 무매개성을 향한 꿈(147p)”을 보여준다고 할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 이 억측은 발코니 구조가 조르주-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에 의한 도시 재생 사업의 결과물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면서 “총체적으로 지각되는 응집력 있는 세계가 이제 사라져버렸음을 극적으로 보여(149p)”준다는 급진적 주장으로 점프한다. 그러더니만 발코니의 초록색 방사형 및 원형 패턴이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굴절 광학」에 등장하는 양안적 시선의 다이어그램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난간의 기하학적 형태들이 시각에 대한 지도로서 유효하다.”라고 말한다(153p).
나는 지금 이 억측을 설명하면서 중간중간에 저자가 인용한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와 라캉(Jacques Lacan)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거쳐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최면을 건다: ‘나는 지금 억측을 하는 게 아니야. 너도 봤잖아, 이 저명한 시인과 학자도 내 해석을 뒷받침해준다는 사실을’ 주의 관리 기술의 역사에서 최면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논쟁적인 도구였지만, 우리까지 이런 기술에 속아 넘어갈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제2장의 본론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지금 살펴본 것은 제2장의 초입에 해당하는 작품에서의 억측이다. 제2장의 본론은 <온실에서(1879)>라는 작품이다. 저자는 일단 이 그림 속 남자가 사시나 다름없으며, 통일성이 깨진 시각장 내에 있다고 주장한다(180p).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은 귀유메 부부인데, 귀유메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인용 부호’ 혹은 ‘따옴표’라는 뜻을 지닌다(186p). 그런데 그 이름의 뜻과 달리 그림 속 인물들은 불륜 관계를 암시하므로 그림의 표면과 이면을 통해 결속과 해체의 모호성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해석한다. 남자의 손에 들린 담배가 여자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사디즘의 암시를 풍긴다는 억측은 가벼운 편에 속한다(191p).

진정한 억측의 향연은 제3장에서 분출한다. 쇠라(Georges Seurat)의 그림이 통일된 형상과 개별 색점 사이를 오가는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의 통합 모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가 부정하겠나. 이런 단편적인 해석에 만족할 저자가 아니다. 그는 쇠라의 <서커스 선전 공연(1887~1888)>이 무대와 같은 공간성을 살짝 암시하면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 공간을 체감할 가능성이 와해된다고 설명한다. 소실점에 집착하는 서구적 시선의 신화화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주의의 집중과 분산, 그리고 억제와 촉진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는 설명을 지겹고도 장황하게 반복한다(347p).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진짜 억측은 중앙에 있는 연주자 뒤로 가려진 숫자, 매표소 가격표의 끝자리 ‘0’에 집착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이 숫자 ‘0’이 자본주의적 거래의 기호로 읽히면서 그 이전까지 실체로 존재했던 어떤 긍정적 가치들의 와해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자리를 대체하는 매정한 교환 및 거래 행위를 상징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328p).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이 작품은 무대를 암시하면서도 거기에 진입하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그 허무한 빈자리에 매정한 가격 기호만을 덩그러니 남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림의 왼쪽 귀퉁이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 앙상한 나뭇가지 형상은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의 「생리 광학」에 실린 망막 혈관의 도판과 연결된다(355p). 이를 통해 이 그림이 육체적 눈과 가시적 세계의 구조를 하나로 결속했다면서 “~~일 수 있다.”라는 식의 추정을 두 행에 걸쳐 반복한다(355p, 물론 원어로는 다른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다시 그림 속 중심인물로 돌아와 이 인물이 자의식 없는 마리오네트처럼 보인다면서 새로운 시각 매체와 기술에 의해 마치 최면에 걸려버린 근대인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쇠라-자본-최면-영화-정신분석-군중론’을 억측의 사슬로 한데 묶은 제3장은 읽는 일은 고난의 행군과 같았다.

제4장은 그나마 억측이 덜해 편했다. 여기서는 도상 하나하나를 뜯어 보면서 억측의 나래를 피지는 않는다. 세잔(Paul Cézanne)이 도달하고자 했던 보편적 시각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에 대해 포괄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억측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나무와 바위(1900)>를 분석하면서 두 바위 사이에 낀 형상의 나무를 보며 지각적 고착과 해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장면(532p)에서는 ‘아,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실소를 머금게 되면서 끝까지 방심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다.

저자는 서론에서 작품을 매개로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의 이유를 들었다. 이 작품들이 당대의 대단한 분기점이나 이정표가 되었다는 식의 신화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당대까지 누적적으로 벌어진 일들의 영향을 흡수하고 또 어딘가로 영향을 반향하는 무수한 존재 중 하나였음을 예증하기 위해 작품들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의도대로 작동되었는가와 상관없이, 작품 해석 자체가 억측의 탑을 끝없이 쌓아 올리는 구조로 이뤄지다 보니 공연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다양한 이론과 사례와 주장들을 억측과 한데 묶어 일괄 폐기 처분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것들이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해석의 자유이고, 어디까지가 억측일까? 경계는 모호하다. 그래도 듣는 사람 과반수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해석의 자유라는 경계를 가까스로 지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야 워낙 유명한 학자고 이 책도 큰 상을 받은 명저라고 하니 억측의 한계선을 넘어섰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몇 안 될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이름의 권위에 굴복하지는 않으련다. 아무리 봐도 선을 넘었다. 억측이 맞다.
맥락도 중요하다. 얼마든지 억측을 수용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다. 이 홈페이지처럼 개인적 단상들을 마구잡이로 갈겨대는 곳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작정하고 억측할 테니 공감하려면 하고 말려면 빠르게 지나쳐 가라고 하는 텍스트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 책은 철저한 학술서로서 외형을 갖추고 있어서 내 반감이 더 커졌다. 논리 전개의 치밀함과 꼼꼼한 예시를 보면 철저한 합리성과 논리성에 기반했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 논의의 시발점에는 억측의 탑이 위태롭게 서 있다. 논조도 ‘나는 이런 인상을 받았어’가 아니라 ‘마네/쇠라/세잔은 이런 관점을 표현했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작가의 의도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식이니까 동의가 안된다. 아닌데, 그냥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그린 것 같은데, 거기다가 그런 의미까지 담았을 리는 없어 보이는데…
억측 말고도 문제가 더 있기는 하다. 인용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이 학습해온 시간을 증명하면서 박학함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그랬으리라고 추측한다. 하나의 주장을 놓고 인용의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다 보니 정작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길을 잃고 만다. 저자의 주의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엄청난 주의가 필요하다.
대략 이런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주의와 지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산업사회의 성장 패러다임에 결부되면서 주의관리의 기술이 고도화되었다. 생산과 소비를 모두 촉진하기 위해 주의란 필요에 따라 집중될 수 있어야 했고, 또 필요에 따라 분산될 수도 있어야 했다. 궁극적으로 주의력 관리를 위한 최종 심급에서는 스펙터클이라는 기제가 널리 활용되었는데, 스펙터클은 본질적으로 수동적 보기를 강요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자발적 만남의 능력을 완화하는 경향이 있다(622p). 만남에는 힘이 있다. 변화를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집단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에 매몰되지 말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발적인 유희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594p). 이 정도가 저자가 주장하는 바인데, 이러한 주장은 엄청난 인용구의 비곗덩어리에 파묻혀 있어서 발골이 쉽지 않다. 주체적 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자에게 주의를 기울이게끔 훈련까지 시켜주다니, 이것 또한 저자의 의도일까?
공연한 억측은 반감만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거부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달으며, 무언가 발표하고자 할 때 어쭙잖은 작품론으로 시작하려 했던 나의 지난날들을 반성해 본다.
“아마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 가장 허튼 소리를 많이 듣는 것이 박물관에 있는 그림일 것이다.”
에드몽, 쥘 드 공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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