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디사나야케의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

Ellen Dissanayake, Homo Aestheticus: Where Art Comes From and Why

초광의적 예술 개념의 딜레마

예술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공들여 만들고,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여기서 인간은 어떻다는 식의 보편화된 진술은 대게 진술 주체인 나의 욕망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그런 욕망이 있음을 알고 있고, 내가 내 주변의 인물들도 관찰해 보니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보편적이더라는 귀납적 추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욕망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예술 창작 및 향유의 욕망이 정말 인간 종의 생물학적 보편성인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인지, 인간의 다른 활동 유형들과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인지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봐도 논증이 까다로워진다. 우리는 어떤 욕망이 신체에 내장된 것인지, 타인이나 사회문화적 압력에 의해 강제된 것인지조차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엄밀한 분석 과정을 거치더라도 두 측면의 증거가 모두 존재하므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지는 못한다. 위대해 보였던 앎이란 한두 층만 벗겨내도 초라한 나신을 드러낸다.

저자 엘렌 디사나야케(Ellen Dissanayake)는 예술이 인간 종의 신체에 내장된 보편적 충동이라고 주장하는 데 이 두툼한 책 전체의 분량을 오롯이 할애했다. 이러한 접근을 저자는 종중심주의 혹은 다윈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술은 문화적 학습이라기보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질에 가깝다(15p).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고, 전파하는 것이 인간 종의 번식, 생존, 유지에 유리했으므로 예술이라는 행위와 결과물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예술에는 인간을 번영 및 유지하게 하는 일정한 생물학적 역할이 있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자연의 불확실성과 잠재적 위험에 대처하거나, 물리적 실체가 없는 문화와 제도를 구상하거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상대를 구별해 낸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중요한 도구이자 촉매제였다. 예술은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형성하며 통제할 수 없는 힘의 범람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거나, 집단의 힘을 결집하게 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게 한다. 예술은 특별하게 공들여 모양을 지어낸 무언가로, 그 ‘특별화하기’ 자체로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가치를 담거나 전달할 수 있다. 그 특별함을 만들거나 분별해 내는 능력은 개인의 비범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특별함에 공감하는 특정 집단의 일원임을 증명한다. 예술이 문화의 징표가 됨으로써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예술을 매개로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 예술의 효과가 신체에 작용하여 감정을 변화시키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등, 이 모든 효과는 예술이 인간 종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대표적인 방식들이다.

예술은 기분과 감정을 변화시키고, 그렇기에 상당한 노력이 투입되며, 구체적 형태는 다르더라도 동서고금 인류의 공동체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예술은 유희의 일종이고, 유희란 기본적으로 비일상성과 가상성을 가정한다. 비일상성과 가상성의 결합은 평소 일상에서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이러한 힘은 예술이 제의에 투입되고, 제의가 예술적으로 고안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예술, 제의, 유희는 특별화하기라는 맥락에서 일맥상통하는데, 예술의 근본 이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세 개념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며 엄밀한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어찌 보면 상식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주장을 방대한 인류학과 신경과학 문헌들까지 끌어와 굳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 했던 이유란 무엇일까. 저자가 앞세운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일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에 대한 저항에서 발흥하였고, 그에 따라 절대적 원칙이나 보편적 이론 따위를 거부한다. 대신 본질 없는 무제한의 상대성으로 나아간다. 이 대목에서 구체적 맥락에 기반한 기호의 해독이 강조되며 비평가 및 독자 권력이 대두된다. 이 같은 절대적 상대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상은 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식자의 착각이 도사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에 기반한 식자들의 사유 체계에 불과하다. 읽고 쓰는 능력에 익숙해진 현대 문명인은 이 방식이 인류 전체와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얼마나 편협한 방식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인류는 구술사회에서 읽고 쓰는 사회로 넘어가며 대상과 언어 사이에서, 그리고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비판적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식자들의 기교적이고 독립적인 사유가 가장 극에 도달한 사고체계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상이나 실체와 다소 거리를 두고 활자로만 세상을 사유하는 식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고체계에 불과할 뿐, 그것이 예술의 종중심주의적 본질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바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언어 없이는 사유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활자가 없던 시대에도 예술과 사유는 가능했다. 언어가 의미를 담는 중요한 그릇인 것은 분명하나, 언어가 없던 시대에도 종 특유의 지향성에 따라 특유의 여러 행동은 존재했으며, 그러한 지향성이 현재의 언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봐야 한다. 구술언어조차 없는 인간이라도 무언가를 공들여 만들거나 모양을 짓는 행위는 가능하다. 예술은 활자 언어 이전의 생물학적 본질이다. 오히려 활자의 시대가 고도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예술에 관해 너무도 많은 글을 쓰며 오로지 편협한 예술 개념만을 둘러싼 독특한 사유 체계를 만들었다. 그 반대에서 일련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사유 체계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운 미학적 양식을 창안했고, 예술은 즉각적·신체적 즐거움과 감흥을 주는, 그리고 감정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본연의 기능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예술은 식자들의 사유 체계 속에서 해독을 기다리는 하나의 차가운 텍스트로만 굳어져 대중의 삶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이 그 중심적 선구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점차 인문학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변해가는 상황에 저항하고자 누구나 예술의 창안자이자 소비자가 될 수 있었던 원시를 희구하며 종중심적 관점의 보편적 예술론을 꺼내 들었다. 평범한 감정 표현조차 유보하곤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펄떡거리는 날 선 주장들로만 초지일관 묵직하게 밀어붙인 책은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예술이 인간 생물 종의 보편적 욕망이자 행동양식이라는 중심 주장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예술이 보편적 행동이라는 당연한 주장에 지면이 할애될수록, 그 예술에 부여된 광의적 정의가 예술의 매력을 상당히 반감시키는 면이 있음은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보편적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려면, 일단 예술의 개념 정의를 아주 넓게 잡아야 한다. 당연히 오늘날 ‘순수예술’ 개념과는 다른 광의적 예술 개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근대적 예술 개념이 서구 낭만주의 시대의 최신 발명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광의적 정의로 예술의 종중심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예술을 광의적으로 정의하면서 인류 보편적 행동임을 주장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저자가 원하는 예술 대중화나 예술과 삶의 밀접도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사람들이 예술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거기 몰입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오늘날 선망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 아무나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예술을 선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 예술론을 강조하기 위해 아기들이 땅바닥에 찍찍 그은 기하학적 선들도 예술이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맞다고 답하겠지만, 동시에 내가 추구하고 싶은 예술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즉, 예술의 종중심주의적 보편성은 인정하면서도 예술을 인간 존재의 증명이자 고고함의 표현인 최상의 창작 활동으로 옹립하는 문화적 계층의 사다리는 걷어차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설령 나의 현주소가 그 사다리의 최하층이라고 하더라도 사다리 자체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도 예술의 보편성 인정이 가치 평가 없음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말미에 강조해 두었다. 409p)

저자의 주장을 정신 줄 놓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특별하게 공들이고 모양 지은 것은 모두 예술이니까 결국 예술은 보편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러한 ‘초광의적’ 예술 개념이 우리 삶에서 정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한다. 예술이 어쭙잖은 식자들의 중재 없이 대중의 일상에 들러붙어야 한다는 지향점은 ‘어떤 종류의 예술’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 그곳을 향해 가고자 하는 열망의 발걸음을 충분히 끌어모아야 한다는 지향점과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이해 보이는 두 지향점은 서로로부터 영양소를 빨아들인다. 결국은 또다시 스펙트럼의 풍성화가 관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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