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사회 展 (문화역서울284)

커피로 보는 사회사이다. 이 사회사는 단순히 통시적 계보학에 그치지 않고 공시적 현상학으로 확장된다. 커피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혹은 우리 사회가 커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되짚어보고, 공동체와 나 자신에게 커피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질문할 수 있는 전시였다.

박길종, <커피, 케이크, 트리>, 사진을 못찍어서 이투데이의 김소희 기자 사진을 가져왔다.(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703079)

약간은 키치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구 서울역 청사로 들어가면, 박길종의 <커피, 케이크, 트리>가 시야를 독점한다. 거대한 케이크 구조물을 크리스마스 트리의 색조로 꾸민 뒤에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와 관련된 오브제들로 장식했다. 다양한 물건 중에서도 90년대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총천연색 플라스틱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들은 제작 당시에는 미학적인 가치가 덧입혀 질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을 그야말로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그런데 기차역을 개조한 전시장에 가져다 놓으니 시간, 관계, 물질, 권력에 대한 온갖 사유들을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살림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데, 정리는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던 어느 살림 전문가의 충고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누가, 감히, 어찌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이렇게 훌륭하게 쓰일지도 모르는데.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회화와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해 왔던 백현진은 귀빈예비실 바닥 전체에 커피 원두를 깔아 놓았다. 이 공간에 7미터쯤만 다가서면 이미 커피 향이 진동한다. <방>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작업은 바닥에 깔린 커피 원두 외에는 볼 것이 없다. 원두 외에는 중앙 저 편에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동시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커피 원두를 태연자약하게 밟고 걸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모래보다는 굵고 자갈보다는 작은 이 물질들을 밟고 걸으니 자박자박 소리가 다소 생경하게 방안을 채우며 발목까지 움푹 들어간다. 마치 내 발길을 피하려는 듯 바닥까지 이내 자리를 내어준다. 서울 한복판에서 커피를 밟으며 다소나마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발바닥에 묘한 감각을 새겨놓는다. 이 작품은 동시대 미술의 총아마냥 추앙받는 ‘인터랙티브’라는 개념이 비단 모니터 앞에서 손을 휘젓는 수준의 허망한 몸짓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로 말은 안하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인터랙티브는 살과 살이 뜨겁게 맞닿는 애무가 아니었던가? 백현진은 우리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칭송하면서 인증샷을 찍고 입으로 들이켜던 커피를 다른 방식들로 즐길 수 없는지 되묻는다. 즉 커피의 원천을 마음껏 밟고 움켜쥐고 뿌리고 애무해보라는 것이다. 나도 시키는대로 했다. 원두 한 알은 첼시 부츠의 높은 주둥이 마저 뚫고 들어와 한 시간 가까이 밑창과 발바닥 사이에서 돌아다녔다.

진짜 인터랙티브는 양민영의 <오아시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자판기로 구성된 설치작업이다. 작가가 외장을 손 본 실제 자판기 안에 수공예로 정교하게 제작된 캔 조형물과 종이컵이 들어있다. 돈을 넣고 뽑는 구조도 자판기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그런데 천원을 넣고 뽑은 이 캔 안에는 커피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커피 광고 이미지를 조합한 아주 작은 소책자가 들어있다. 이들 커피 광고들에는 한결같이 당대 최고 톱스타가 등장하여 휴식, 낭만, 사랑, 교양 같은 그 시대가 동경했던 이상적 가치들을 철석같이 약속한다. 흘러가버린 자판기 시대는 커피 소비 방식의 변혁을 상기시키면서도 커피 자체가 우리에게 제시했던 이상적 가치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카페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정신적인 의미보다도 실무적인 의문이 더 앞섰다. 아니 도대체 이 천원짜리 오브제의 원가는 얼마이며, 어떻게 전시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보충할 계획이지? 이 가상의 캔을 만들기 위한 가내수공업은 누구의 공로로 기억해야 하나?

전시장 곳곳에서는 전시 주제에 맞게 커피를 음미할 수 있다. 총 세 곳에서 커피를 주는데, 놀랍게도 무료이다. 나는 2층 <근대의 맛> 코너에서 카페 ‘펠트(FELT)’가 제공하는 화이트 플랫을 마셨다. 일반적인 화이트 플랫과 달리 달콤한 시럽이 가미된 것으로, 이번 전시를 위하여 특별히 고안되었다고 한다. 쌉싸름한 커피와 짙고 깊은 우유크림, 그리고 적절한 수준의 단 맛이 가미된 최고의 커피였다. 무료라는 것이 황송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준 높은 커피임에 틀림없다. 좋은 사유의 지점들로 가득한 무료 전시에서 이 정도 수준의 무료 커피라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한 이번 전시는 문화정책의 역할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혹시 세금 내는 것이 아깝다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의 손을 부여잡고 문화역서울284로 가보기 권한다. 전시기간이 짧으니 서둘러야 한다.

커피사회 展 (문화역서울284)”에 대한 답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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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 언제 다녀오셨어요? 지난번에 여기 좋다고 댓글달려다가 깜빡했었어요. 2층 진짜 좋지 않아요? ㅋㅋㅋㅋ 클래식 빵빵하고 커피맛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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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난 화이트 플랫 다 떨어져서 못 마셨는데🤢그 대신 먹은 에스프레소도 맛은 있었어요~ 음악도 좋았고요! 부츠 속 원두 한알은 다음 날 사무실에서 발견했다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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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 이 전시가 ‘커피사회’였군요!
    전신주였나 어떤 포스트마다 붙은 스티커를 봤는데, 새로 생긴 카페 광고물인줄 알았어요.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덕분에 독특한 전시 관람하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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