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o Sehgal, 2026.3.3.-6.28.
고품격 반응 실험
전시장 정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유니폼과 명찰을 패용한 안내원들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관람객들과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공연자로 돌변한다. 만면에 희번덕거리는 미소를 띠고 “This is so contemporary”를 외치며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이건 너무 현대적이야, 2004>). 전시장에 들어서려는 관람객으로서는 어떻게든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고, 사람인 이상 뭐라도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황망함 속에 애써 못 본 척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눈을 마주치며 같이 막춤을 추거나, 그도 아니면 수줍은 척 적당히 박자만 맞춰 주면서 지나치거나. 우리는 분명 이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나는 3번이다. 당신은?). 이러한 선택에는 개인의 타고난 성향, 사회문화적 배경, 아비투스, 심지어 찰나의 기분 상태 및 신체적 컨디션 따위가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 양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신은 왜 반가운 미소로 춤을 추며 당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을 무시했는가? 동행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승인된 적절한 행동 규범이라서? 아니면 그냥 지독한 내향형이라서? 자문하다 보면 어떻게든 답은 나온다.
전시장 전체가 반응 실험장이나 마찬가지다. 로비에서도 그저 멍하게 앉아 쉬고 있던 사람 중 일부가 공연자였음이 밝혀진다. 누군가의 선창에 이어 한두 사람이 화음을 섞기 시작하고, 어느새 공명은 카페 앞 로비 전체를 메우게 된다(<무제, 2026>). 공연자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신체적으로 결속한다. 그리고 흩어진 줄 알았던 이들은 ‘진짜’ 관객들과 어우러져 작품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작품은 관객 속에서 시나브로 출발하여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했다가 어느새 다시 관객 속으로 융화되어 흩어진다.
바코드를 찍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가 만든 비즈 커튼을 지나 지하 M2 지하 1층으로 들어가더라도 본격적인 작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어느 타이밍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작품은 확연할 수도 있고, 긴가민가할 수도 있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구불구불한 장발의 한 남자와 여리여리한 두 여자가 주술적인 화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성가 같기도 하고 기계음 같기도 한 음성 신호를 주고받던 인물들은 기이한 동작의 안무를 곁들이기도 하고, 관람객들 옆에 앉아 구경꾼 행세를 하기도 한다(<이 환희, 2020>). 처음에는 누가 공연자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곱씹어 찬찬히 뜯어 보면 확실히 매력적인 인물들이기는 하나, 일단 전혀 튀는 구석 없는 평상복 행세이고, 관람객과 공연자가 공간적으로도 전혀 분리되지 않는 홀에서 모든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누구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꼼꼼히 따져보려면 한 공간 안에 공연자들과 뒤섞여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만, 상황 파악을 위해 두리번거리는 행세가 너무 과장되어 있다면, 다른 관람객들이 나를 공연자 중 일부로 오인할지도 모른다.
반응 실험이 정점에 이르는 공간은 M2 지하 1층 중앙 홀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나온다. 여기서는 한 쌍의 남녀가 말 그대로 엉겨 붙어 있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서로를 갈구하고, 끌어당기고, 키스하고, 쓰다듬고, 밀쳐냈다가 다시 엉겨 붙기를 반복한다. 키스하는 남녀야 통속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건만, 공공장소 스킨십에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는 우리네 정서에서는 이렇게 가까이서 생생하게 누군가의 키스를 대놓고 쳐다본다는 것이 대단히 이채로운 경험임은 틀림없다.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고도의 교양을 요구하는 문화예술 공간에서 이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의외성에서 오는 충격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기제가 먼저 작동한다. 그리고 공연자들을 바라보며 둘은 무슨 사이일까, 몇 시간 단위로 공연을 하는 걸까, 쉬는 시간은 있는 걸까, 얼마 받을까, 연기 전공일까, 둘이 아침에 싸우면 공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양치는 몇 시간 단위로 할까 등등 별의별 실무적 호기심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공연자 섭외 조건에 대해서는 공고문을 통해 대강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공공연히 키스를 나누는 공연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그들의 노력에 상응하는 합당한 대우인 것인지, 아니면 약간 시선을 피해주는 것이 사회적 도리에 부합하는지 헛갈리면서 시선을 둘 곳이 마땅찮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때쯤 주변에 빙 둘러쳐진 로댕의 작은 청동상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작품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시선’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괜한 안도감이 든다. 그쯤 되면 주변 관람객들의 표정도 살피게 된다. 그들은 무슨 생각일까, 나와 같은 생각일까, 그들도 표정을 감추고 시선의 갈피를 잡기 위해 노력 중일까 등등을 생각하자면 어느새 이 낯선 사람들과 공모하여 한바탕 부조리극에 가담하고 있는 듯한 초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M2 지상 1층에 올라가면 모더니즘 조각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작품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한 공연자가 매우 느린 속도로 꿈틀거리고 있다(<무언가 당신 코 앞에 나타나게 놔두는 대신 춤추는 부르수와 댄 그리고 다른 것들, 2000>). 내가 이 홀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면 사람들이 나를 공연자로 착각할까, 라는 망상에 잠시 빠져본다.
오늘날 경제 논리가 합리성과 효율성만을 강요한다면,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부조리함의 뒷공간이 필요하다. 어지간하면 만날 수 없을 대상을 예기치 못한 시공간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것만으로도 경직된 사고의 틀에 균열이 생긴다. 아스팔트 틈새에서 민들레가 자라듯 그 균열에서 억눌렸던 자아가 발견되고 새로운 창조성이 싹을 틔우게 된다.
티노 세갈(Tino Sehgal)이 리움에 차려 놓은 반응 실험장은 미술 제도를 전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제도에 약간의 생채기를 만들어 그 틈새를 매개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접붙이기를 시도할 뿐이다. 그 정도의 유연한 개입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창출될 수 있음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개입이 성립되려면 참신한 리더십과 함께 충분한 인건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3개월 동안 이어지는 이번 전시를 위해 80명 이상의 공연자가 섭외되었고(브로셔에 등장한 이름을 일일이 세어봄), 최저시급 이상의 사례비가 지급된 것으로 추정된다(시민 참여형인 <이건 너무 현대적이야> 기준). 극도로 양극화된 미술 제도권 기관들의 생태계를 감안할 때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시 한번 드러나는 진실이지만, 미술 제도를 비판하는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주체는 최고 수준의 미술 제도 기관이다. 다만, 그 저의가 의심스러울 뿐.
No Day But Today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