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에멀링의 「20세기 현대예술이론」

작고, 예쁘고, 새빨간 핸드북에 현대 미술이론의 정수를 담았다. 물론 엄밀히 ‘미술이론’은 아니다. 미술을 위해서 탄생한 것들이 아님에도 미술계에서 주로 차용하는 이론들이다.

구성면에서는, 이론별로 풀어가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풀어간다. 이는 저자가 아직은 이론과 사상에 있어서 ‘작가성’을 견고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작가의 죽음’은 작품 분석에서 중요한 관점이지만 비평이론에 있어서 만큼은 작가의 장례식이 도대체 언제쯤 열리게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20세기의 사상적 토대를 만들어간 대가들의 궤적은 그만큼 굵고 선명하며, 지금도 그 운동성이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잦아들기는 커녕 무수한 후학에 의해 기하급수적인 가속도마저 붙어 있다. 21세기가 지금까지 걸어온 짧은 시간처럼 평탄하게 흘러가게 된다면, 예컨대 프랑스혁명, 68혁명, 세계대전,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사상적 변혁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들의 이름에 계속 빚을 져야 할 것이다.

평소에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습득한 이론적 지식들이 한 곳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데, 이 책은 그러한 미덕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해석은 각 사상가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쉽고 간결한 편이다. 번역도 준수하다.

이론을 습득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원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고, 원서의 번역본을 읽는 것은 그 다음이다. 원서의 축약된 번역본은 가장 낮은 수준의 텍스트에 해당하지만 시간, 돈, 그리고 열정의 제약에 묶인 우리에게는 이마저도 감지덕지이다.

여기까지는 습득에 관한 이야기이다. 습득과 자기화는 별개이다. 자기화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토대로 사유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 이론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 이론에 나만의 주석을 덧붙여야 한다. 해체는 그 다음이다. 갈 길이 이렇게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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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 이 책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평적 서술에 위대한 연구자들의 이름과 키워드를 들먹이면서 스스로의 주장 주변에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이겠지만, 그러기에는 뻔뻔함이라는 덕목이 요구된다. 사실 이론을 활용하는 것에 앞서, 수많은 텍스트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발견했을때 모종의 친숙함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성공적인 독서였다고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론가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동조하는가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이는 마치 중학교 동창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학창시절에 나를 괴롭혔었는지 존중했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일단 반가워하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단 익숙하면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다. 이 책은 결국 친숙함을 위한 것이고, 우리는 친숙함이라는 길잡이를 넘어 더 심화된 개별 텍스트로 뛰어 들어야 한다.

말미에 붙은 후기에서 저자는 마치 베스트앨범을 만들 듯 모든 이론가들의 요지를 한데 엮어 짧고 아름다운 에세이를 남긴다. 이 글의 요지는 작품에 의미와 정답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고, 예술 경험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라는 것이다. 비평이론을 친구 삼아 권위와 의미, 그리고 역사에 갇힌 미술사의 탐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인 「Theory for Art History」는 그러한 관점의 반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담론들이 그렇듯, ‘無본질/無정답’에 대해서는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그 강조가 강박적으로 반복될 때는 회의가 찾아오기도 한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면 이 모든 읽기, 생각하기, 쓰기는 도대체 무슨 가치를 지닌단 말인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은 벽돌 하나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기사 그 벽돌 하나라도 제대로 쌓고 세상을 떠난다면 의미있는 삶이었다고 누군가 기억해 줄 것이다.

제이 에멀링의 「20세기 현대예술이론」”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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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감벤 부분 어렵지않아요? 무슨말인지 봐도 봐도 모르겠던데… 특히 궁핍 어쩌구하는 부분과 잠재력에 대한 부분이요.

        Liked by 1명

        1. 저도 잘 이해 안가요. 그런 부분은 과감히 넘어가요. 키워드만 기억해 뒀다가 필요할때 다시 찾아오면 되니까. 어차피 이런 책들은 색인목록에 지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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