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기 절제를 위한 표어가 있습니까?
매일 여섯 시 반에 기상하고, 정시에 삼시세끼만 먹으며, 야식과 술담배를 하지 않고, 매일 1시간씩 운동하며, 걸어서 출퇴근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으며, 하루 총시간의 1/12을 오롯이 씻는 데 할애하는 나에게 자기 절제를 다룬 이 책은 딱히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이 책에 소개된 실패 사례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동시대 선진국 시민 전체를 놓고 봐도 거의 자기 절제의 화신에 가깝다고 감히 추정해 볼 수 있다. 누군가 여기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그에게 10년 이상 가계부를 써본 적이 있는지, 읽었던 모든 책의 서평을 10년 동안 홈페이지에 올려본 적이 있는지 물을 것이다.
스스로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 절제라는 개념은 내 삶에 진득하니 체화되어 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러지 않고서는 박 터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고, 지속 가능한 삶의 기반을 형성할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이런 내가 절제 실패의 온갖 사례와 원인, 그리고 해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와 정반대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과정에 가까웠다. 늘 그렇듯 나의 반대 극점을 지긋이 바라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왜 자기 절제가 어려운가? 기질, 사회, 문화, 기술 등 복합적 영향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 주목하고 싶다. 절제를 위해서는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바람직한 이상향을 그릴 수 있고, 그 구체화된 상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그 상에 도달하기 위한 현재와 미래의 실천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그것을 행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경로에 반대되는 행동은 안 하면 된다. 날씬하고 건강한 미래의 신체를 그렸다면, 초가공식품을 버리고 운동을 하면 된다. 부유한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면, 당장 OTT를 끄고 투잡을 뛰러 나가면 된다. 원리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실행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대다수는 미래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하여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주는 단기적인 쾌락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고 즉각적이며 말초적인 즐거움에만 점철된 인생을 선택하는 이들에게는 상상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훈련에도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므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결국 최소한의 자제력이 있어야 자제력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자제력의 부족은 자제력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절제 실패는 가족, 이웃, 동료 등 인접한 다른 사람에게 부담의 짐을 안기고, 나아가 더 폭넓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류 전체의 평균적 절제력을 끌어 올리는 과제는 인류가 공통으로 짊어져야 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성장 과정을 거치며 적절한 강도의 자제력 훈련 기간이 강제로 주어진다면 가장 좋겠으나, 누구도 그 ‘적절함’을 최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고, 자제력 훈련을 강제할 수도 없다.
이 책은 자기 절제의 해법을 제공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저자는 장기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 쾌락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동서고금의 무수한 선례 가운데서 발췌하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가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2011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책은 당대 시대상을 고려하여 자기 절제 실패와 글로벌 금융위기의 관련성을 자주 예로 든다. 또한, 오늘날 미국인들의 고질병인 폭식, 비만, 음주, 이혼 등 사례도 자주 거론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당대 미국의 문제들과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하는 자제력 실패의 문제들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제력을 잃은 폭탄들이 지역사회 곳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고 돌아다니다가 한순간 비극적 참사를 일으키곤 한다는 점, 그와 같은 참사를 예측 및 예방하는 능력이 점차 퇴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참사의 빈도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듯하다.
오늘날 자기 절제 실패의 문제 정중앙에 기술혁신이 있다는 점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손바닥 위 작은 화면 위에서 손가락 몇 번 까딱하거나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수천수만건의 초고해상도 데이터를 무한정 섭취할 수 있는 이 시대는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수액을 빨아 먹고 있다. 투입-산출이 긴밀하게 엮인 디지털 네트워크상의 피드백 루프에 익숙해진 우리의 뇌는 상대방의 눈을 보며 대화하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고,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기던 과거의 작동 방식에서 아무런 자극도 얻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기까지 2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절제력을 잃는 순간 우리 주머니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은 그저 돈이나 시간에 그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론하는 방법조차 잊게 될 것이다.

자기계발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절제력을 잃은 이들을 위한 몇 가지 대안은 제시된다. 작은 일에서부터 의지의 근육을 키워라. 의지력은 마치 근육처럼 그 탄력이 높아질수록 더 큰 힘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의지력이 분산되는 일을 막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 믿음직한 감시자를 두어라. 자기 욕구의 근원을 성찰하여 진짜 욕구인지, 아니면 허상인지를 분별하라. 충동을 부추기는 주변 환경을 뜯어고쳐라. 운동을 통해 집중력을 높이고 체력을 키워라. 좋은 행동을 억지로라도 반복해서 습관화하라. 이상적인 자아상을 수시로 그려보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라.
다 좋은 말이다. 이상의 해법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늘 본능을 억제하고 싶은 자아,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고 싶은 자아를 양옆에 끼고 함께 산다. 사고하는 동물로 이 땅에 태어나 두 자아 중 어느 한쪽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다면, 결국 다시금 균형이 답이다. 완전한 방종이 파멸이라면, 완전한 절제도 언젠가 폭발하여 파국으로 치닫기는 마찬가지다. 설령 완전한 절제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되게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교황이나 달라이 라마가 아닌 이상, 그 성공이 각자의 삶이나 공동체에 줄 수 있는 가치란 매우 제한적이다.
의식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무심결에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는 방법 한 가지는 두 줄의 표어를 전면에 내세워 공식화하고, 끝없이 되새김질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 홈페이지 제목은 ‘no day but today’이고, 카톡 프로필은 ‘enjoy responsibly’이다. 전자는 뮤지컬 「렌트」에서, 후자는 빈에서 마신 맥주캔 경고문구에서 따왔다. 거의 10년째 그대로다. 각기 다른 시기, 다른 계기로 그 자리에 들어섰지만, 연결해 보면 이보다 상호보완적일 순 없어 보인다. 스스로 내세운 이 강령만 지킨다면, 내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파멸도 폭발도 없이 적절한 긴장 속에 순탄하게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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