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가상 2018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17 展>을 보고 통인시장에 들러 먹었던 고로케의 기름맛이 아직도 선명한데, 어느덧 2018년의 작가를 뽑고 있다. 미술계의 연례행사로 ‘한 해’라는 작위적인 시간 단위를 새삼 상기한다. 어찌보면 1년의 시간을 전시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동차세 납입이나 건보료 인상 따위로 지각하는 것 보다야 훨씬 낭만적이다.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의 터너 상(Turner Prize)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한 <올해의 작가상> 제도는 한 해 동안 가장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4명(팀)의 후보를 선정하여 그룹전을 개최한 후 그 중 1명(팀)에게 영예를 안기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술을 서열화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 기획의 모체가 되는 터너 상에서도 끊임없이 대두되나, 이제는 그 질문 자체가 진부화되어서 다들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로 국한해서 보면, 이러한 질문의 무력화는 <슈퍼스타K>나 <나가수>와 같은 경연 성격의 콘텐츠가 일상화되어 버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현 시대의 입장은 대체로 ‘예술의 서열화는 불가능하나, 그래도 상대적인 감동의 크기는 투표에 의하여 보편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 ‘최고 예술 선발대회’는 모든 작품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에 대한 강력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할 더욱 중요한 목소리는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려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해의 작가’ 선정 과정에 숨겨진 특정 조직의 의도를 읽어내는 안목, 그리고 나만의 ‘올해의 작가’를 선정하고 그 이유를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비평적 관점이다.

제 아무리 상대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일지라도 이런 전시에서는 내면의 투표를 하기 마련이다. 이 제도가 대략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안다면, 관람객은 마음 속에서 ‘나만의 한 표’를 던지기 마련이며, 누가 ‘올해의 작가’가 될 것 같다는 정도의 예측 조차도 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작년 전시에서 써니킴에게 한 표를 던졌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송상희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쓴 맛을 보았다.

사실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과 누군가가 최종 선정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두 작가를 눈여겨 보았다. 즉, 정재호를 응원하면서, 옥인콜렉티브가 최종 선정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것은 예측확률을 높이기 위한 꼼수가 절대 아니고 단지 지지와 예측의 합리적 조화를 모색한 것뿐이다. 이로써 50%의 확률게임에 배팅한 셈인데, 이 두 팀 중에서도 최종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를 동시대 미술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결여된 자로 매도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정은영은 전후(戰後) 소소하게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을 재조명하면서 10여점의 영상물 및 퍼포먼스를 출품하였다. 미술관에서 영상물을 전면 퇴출시켜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나는 오락실을 연상케 하는 단촐한 의자들과 그 앞에 놓인 대형 모니터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단 한 점의 작품, <죄송합니다. 공연이 지연될 예정입니다.(2018)>만을 감상하였다. 이 영상은 남성 배역을 전문으로 소화하는 한 여성국극 배우가 자신의 훈련 과정과 공연에 관한 여러 소회들을 진솔하게 풀어 놓는 이야기이며, 중간중간 실제 공연의 시범도 보여주었다. 배우의 눈빛과 목소리가 뿜는 힘이 미니멀한 검은 무대를 뚫고 빛을 발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공연에서 필연적으로 남성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가 있게 마련인데, 한 배우가 성별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겪는 미묘한 갈등과 환희 속에서 젠더수행의 이슈를 끄집어 냈다. 연기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어서, 그것에 몰입한 주체에게 상상계와 실재계의 와해는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는 디오니소스적 환희의 순간이며, 플라톤의 고요와 평정을 늘상 강요받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순간이다.

정은영은 잊혀져가는 ‘여성국극’을 재발견하면서 이종(異種) 예술 간의 통섭적 통찰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작가가 주목했던 젠더수행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공감하기 힘들다. 단지 여성들로 구성된 창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젠더수행의 함의들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여 자의적이며 감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거의 시장논리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국극의 생몰 과정을 감안할 때에도 이데올로기적 논평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후보자 구성의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여성계 지분’을 고려한 것은 아니길 바란다.

구민자는 날짜 변경선을 사이에 두고 하루를 두 번 사는 사람과 하루를 건너뛰는 사람을 병치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제도에 부여하는 근거 없는 믿음들을 고발한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퍼포먼스 과정에서 작가가 사용한 오브제들을 미술관 바닥에 정갈하게 나열하는 방식은 과도한 의미 부여의 전형이었고, 스타가 되고 싶은 작가의 치기 어린 자의식으로 느껴졌다. 사유의 깊이는 실개천인데 아카이브는 나일강이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정재호는 무의미해 보이는 오래된 건축물을 한지에 아크릴로 집요하게 재현했다. 지은지 5, 6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건축물들은 딱히 이름도 없이 허망한 번지 수로만 회자될 뿐이고, 언제 재건축되더라도 납득이 갈만한 퇴물이다. 이 퇴물들은 최근까지도 태권도장으로, 슈퍼로, 문방구로, 책방으로, 교회로 기능을 탈바꿈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동시대적 삶을 품어왔다. 작가는 이름도, 양식도, 창작자도 없는 그 구조물들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며 그것을 오히려 기념비로 승화시킨다. 녹슨 창틀, 벗겨진 페인트, 떨어져 나간 벽돌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것들을 화면 가득 확대하면서 치밀한 마감으로 재현하는데, 쓸모 없는 것에서 애써 의미를 발견하려는 구도자의 행적이 읽힌다. 관람자는 그 구도자가 투입한 시간을 나름의 방식대로 환산해가며 의미의 재구성에 자연스럽게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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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난장이의 공

회화는 인류 최초의 미술로서, 미(美)를 표현하고 감상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에 가장 가깝게 맞닿은 장르이다. 정재호의 작품들은 「올해의 작가상 2018 展」의 유일한 회화였는데, 이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회화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위에서 ‘여성계 지분’을 언급했듯, ‘회화계 지분’을 고려한 후보자 선정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회화의 종말을 애도하면서 회화의 진정한 가치를 구원한다. 건축물의 클로즈업은 차가운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도형으로 치환되며 철학이 없던 개발시대의 미적 함의를 비평의 단상에 올린다. 특히 평면을 탈주해서 건축 모형으로 우뚝 선 입체 회화들은 어느 건축사무소나 모델하우스에서 볼 수 있는 프리젠테이션 모델링을 연상케 한다. 그러한 상업적 모델들은 상업적 유토피아를 보여주게 마련인데, 정재호의 작업은 오히려 쿠르베의 지리멸렬한 사실주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이 ‘설치-회화’는 사라져가는 공간들의 미적 가치를 회복시키면서 영원성으로까지 나아가려는 몸부림이며, 우리의 미감이 얼마나 공간 귀속적인 산물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치밀한 표면처리를 보여주는 전면과 달리 목재 뼈대만 앙상하게 남긴 건물의 기저와 뒷모습은 개발독재 시대의 속도감에 파묻혀버린 철학이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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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소공로 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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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소공로 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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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노들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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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노들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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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2018), 노들회관

정재호는 건축물 연작 외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스틸컷 형태로 남아 있는 편린들을 아크릴화로 출품했다. 직각으로 마주한 두 벽에 걸린 33점의 작품들은 오래 전 TV프로그램, 공상과학영화, 소년잡지 등의 모티브를 담고 있는데, 작가가 직접 수집한 자료들의 훼손된 질감까지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작가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때, 당대 동년배들에게 강요되었던 이데올로기적 미덕은 과학기술이 지닌 무궁한 가능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경제개발과 연계해 사고하고, 스스로 그 주역이 될 것을 꿈꾸는 것이었다. 마치 과학기술의 유일한 목적은 경제개발 뿐이며, 그것만 달성하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 였다. 이처럼 강요된 유토피아는 만화, 잡지, 애니메이션, 캠페인, 공교육 등 다양한 수단으로 합리화되었는데, 작가는 개인화가 부상한 현 시대에 그 기억을 굳이 다시 상기시키며 지금은 정말 달라진 것이 맞는지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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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콜렉티브(김화용, 이정민, 진시우/2009년 결성)는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최종 수상할 것으로 예상하는 팀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 동시대 국내 미술계에서 보기 드물게 상당 기간 일관된 협업을 선보였다. 둘째,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현대미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의구심에 반론을 제기한다. 결정적으로 이 두 이유가 상호 연계되면서 현 정부의 정책방향과 동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에 부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나는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키오스크를 통해 직접 한 표를 던질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관람객들의 표가 심사위원의 의사결정에 조금이라도 개입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답은 대체로 이미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보다 확장된 넓은 저변의 공감대를 탐색해보려는 시도만이라도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투표 후 영수증 용지에 출력되는 작가의 말도 참신했다. 부디 관람객의 투표 결과를 (당신네들만 알고 있지 말고) 가감 없이 공개해주기 바란다.

올해의 작가상 2018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대한 답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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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재의 미술관은 ‘공간의 예술’에 최적화되도록 설계되었어요. ‘시간의 예술’이 이렇게 주류가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미술관에서 영상을 보느라고 서서 사람들에게 발을 밟히거나 그 작은 오락실 의자에 앉아서 팔꿈치로 찍히다보면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죠. 어쩌면 지금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시간의 예술을 담기 위해 구조적인 변혁을 시도해야하는 과도기인지도 몰라요. 유튜브 시대에, 즉 침대에 누워서나 똥을 싸면서도 HD영상을 원없이 볼 수 있는 시대에 미술관은 그 변화를 따라잡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영상은 그림과 달리 관람객이 관람 시간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작가와 미술관이 틀어준대로 맞춰서 봐야하죠. 예술 감상의 권력이 공급자들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는 겁니다. 그동안 ‘저자의 죽음’을 위해 흘려온 고귀한 피들이 다시금 의미 없이 하수구로 흘러들어가 버리는 순간이 돌아온겁니다. 미술관이 영상의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던지, 미술관에서 영상을 모조리 퇴출시키던지,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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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구조적이라고함은 말그대로 건물의 구조성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저자의 죽음을 해석의 자유를 독자에게 넘겨주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했을 때에 단지 감상의 통제권의 유무가 작품 해석의 자유를 저해한다는 것이 비약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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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재의 미술관은 이렇죠. 작품들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관람객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우리의 시각적 지각 능력은 놀라워서, ‘공간의 예술’을 거의 1초만에 온전히 파악합니다. 거기 무엇이 있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느낌을 주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작품에는 눈길 조차 주지 않으며, 반대로 어떤 작품에는 오랜 시간 동안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까지 곱씹어볼 수 있죠. 그것이 우리가 그동안 근대적 미술관에서 누려온 일말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공간이 우리의 동선을 제아무리 호도할지라도 우리는 나름대로의 시지각적 역량으로 빠르게 탐색하고 나름대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 미술관을 매우고 있는 ‘시간의 예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것의 재생, 정지, 되감기, 빨리감기, 다시보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틀어준 대로 보는 것이고, 그 안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전체 러닝타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합니다. 하나의 영상을 완전히 다 보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고 한들 그 영상이 나를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다시 첫 부분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거나, 우리가 시작한 부분이 다시 반복될때까지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간의 예술’이 ‘공간의 예술’을 위해 설계된 세계로 침투함에 따라 겪어야 하는 불편이죠. 해석을 어떻게 하던지 간에 어쨋든 관람객 입장에서 ‘틀어준대로 본다’는 한계에는 변함이 없죠. 게다가 보통의 관람객에게는 하나의 전시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간혹 어떤 전시는 영상물의 전체 러닝타임을 합하면 몇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는데, 도대체 누가 하나의 전시에 그 정도 시간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는 저에게 “보기 싫으면 중간에 일어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않고 그 안에 어떠한 아름다움이나 사유의 가치도 없다고 절하하는 자는 비평의 자격도 없는 겁니다. 결국 비평가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여주는대로 보아야 하고, 건너뛰지 말아야하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을 점거한 영상물들은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작품과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영혼은 시간의 덫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렸죠. 어찌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상이 오늘날 미술의 진정한 대안이며, 새로운 주류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대안을 위한 대안적 공간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QR코드를 관람객에게 배부해서 해당 IP로만 접속할 수 있는 유튜브 URL을 주는 방식은 어떨까요? 아니면 좀더 작고 개인화된 미디어를 제공해서 관람객이 스스로 재생 전반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해주던지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모두에게 배부할 수도 있겠죠. 재원만 받쳐준다면. 하여튼 언제 어디서나 HD영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꼭 근대적 미술관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공간에 갇혀서 오가는 관람객 사이에서 영상을 봐야하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며, 영상이 주류 매체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금,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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