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미술여행] 1일차(2/2) –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산 로코 대신도 회당

2018. 9. 25.

당초 이 여행기는 하루를 하나의 게시물로 작성하는 형태로 쓰려 했다. 그런데 첫 날의 여행기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져 부득이 게시물을 분리하게 되었다.

크기변환_DSC06825

카 도르와 카 페사로를 거쳐, 여행 ‘첫 날’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빌어 몇 곳을 더 돌기로 했다.

크기변환_DSC06821.jpg

카 페사로에서 남서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산 폴로(San Polo) 지구의 심장,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Basilica di 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 성당이 있다. 티치아노가 있다는 것을 예습했기 때문에 이곳을 다음 행선지로 결정했다. 물론 베네치아 유니카로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크기변환_DSC06828.jpg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데이 프라리는 베네치아의 그 많은 성당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1231년 도제 야코포 티에폴로(Jacopo Tiepolo) 치하에서 부지가 교회에 헌납되었고, 건립은 1250년에 시작했다. 중세의 대성당 대부분이 그렇듯, 대략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데에는 100년의 시간이 넘게 걸렸다. 축성식은 1492년 5월 27일에 열렸다.

크기변환_DSC06851.jpg

크기변환_DSC06850.jpg

절제된 이탈리안 고딕 양식의 기품이 느껴지는 외관이지만 실내는 매우 화려한 편이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쟘바티스타 피토니(Giambattista Pittoni), 티치아노(Tiziano)의 회화도 일품이지만 마르코 코찌(Marco Cozzi)의 중앙 성가대석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화려한 목재 조각에 좌석 하나하나마다 성자와 천사들을 새겨 놓았고 금박으로 덧입혀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45.jpg

그래도 역시 주인공은 중앙 재단화,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1516-1518)>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정수를 보여주며 티치아노의 빛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대작이다. 회화 공간은 성부가 위치한 천상의 세계, 성모가 승천하는 전이지대, 그리고 인류가 위치한 현상계로 삼등분 되어 있다. 각 세계는 엄격하게 분할되어 있으면서도 원경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뻗은 손에 의해 다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성부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빛은 성령의 영광을 암시하며 성모의 승천을 합리화하고 싶은 가톨릭 상부의 의지에 힘을 실어준다. 천사와 인물들, 그 누구 하나도 정적으로 방관하고 있는 자는 없으며, 역동적인 동세로 르네상스 전통과 단절을 시도하며 바로크를 예견하고 있다.

크기변환_DSC06846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현장에 있는 실제의 고전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단 한 가지 꼽으라면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서술한 작품 분석은 사실 도판을 보는 누구라도 지껄일 수 있는 말이다. 지금의 사진 및 인쇄 기술은 발터 벤야민이 예견한 기술복제 시대의 특성에 부합하는, 그야말로 대단히 훌륭한 것이어서 때로는 원작을 실제로 보는 것 보다 더 세밀하고 생생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도판이 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맥락 속에 작품과 관람자를 현존하게 하는 실존적 체험이다. <성모 승천>의 위대함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장소와 환경에서 보고 느껴야 한다. 티치아노의 성긴 붓질이 빚어낸 가상의 ‘빛’과 데이 프라리 성당의 중앙 재단에서 떨어지는 실제의 ‘빛’이 공간이 내가 서 있는 공간의 대기를 가득 매울 때, 이 작품이 들어설 곳을 발로 밟으며 치열하게 고민했던 대가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TV도, 사진도, 라디오도 없던 시대의 상인이나 어부가 이 성당에서 느꼈던 영적 황홀의 순간에 아주 조금이나마 이입할 수 있게 된다.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32-e1539068708688.jpg

티치아노의 <페사로 마돈나(1519-1526)>도 마찬가지이다. 5미터에 가까운 이 작품이 주는 공간의 압도적인 힘은 고전 양식의 대리석 틀과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인하여 더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림 속 고전 양식의 기둥과 계단은 실제의 기둥과 대구를 이루며 가상의 인물들 사이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며, 십자가를 맨 아기 천사들은 마치 실제의 창에서 빛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듯한 생동감을 보여준다.

크기변환_DSC06838.jpg

그 밖에도 데이 프라리 성당에서는 베네치아 종교 예술의 위대한 선구자, 파올로 베네치아노(Paolo Veneziano)에서부터

크기변환_DSC06835

이토록 화려한 바로크 장식까지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발견은 바로 이 작품, 주세페 티토(Giuseppe Tito)의 <피에타>이다.

크기변환_DSC06839

크기변환_DSC06840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41.jpg

거의 뼈만 남은 성모와 예수가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잔해의 처절한 흔적만이 현시되고 있다. 이토록 혁신적인 ‘피에타’ 도상은 정말 드물다. 이토록 파격적인 작품이 어떤 경위로 이 고딕 성당에 놓여지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곳에 있는 티치아노의 작품들에 비하면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검색을 해보아도 정보가 별로 없다.

조각가 피에트로 주세페 티토는 1959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루이지 티토(Luigi Tito, 1907-1991)는 화가였다. 루이지 티토의 아버지 에토레 티토(Ettore Tito, 1859-1941)도 마찬가지로 화가인데, 이 할아버지 티토가 예술가 삼대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그는 1910년 브루셀에서 열린 국제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1926년에 이탈리아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손자 주세페 티토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 <피에타> 처럼 골격만 남은 존재의 긴박하고 실존적인 순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혁신적인 종교 도상도 기꺼이 받아들여서 비잔틴 종교화와 나란히 배치하고 있는 데이 프라리 성당의 열린 사고가 인상적이다. 한편으로는, 이 성당이 다른 유럽의 저명한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관광지’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데이 프라리 성당을 나와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베네치아 미술여행 첫 날의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른다.

크기변환_DSC06877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로코(Scuola Grande di San Rocco), 즉 ‘산 로코 대신도 회당’이다. 1478년에 산 로코의 이름을 딴 봉사단체의 회관 부지가 확보되었고, 1515년부터 본격적으로 회관 건립이 시작되어 1560년에 종료되었다. 베네치아 유니카로 패스할 수 없는 이곳의 입장권을 사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적통, 티치아노의 진정한 후계자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틴토레토는 1564년부터 1587년까지 그의 조수들과 아들 도메니코(Domenico Tintoretto)의 도움을 받아 이 회관의 모든 그림과 장식을 책임졌다. 이 그림들은 사실상 기독교 성경/구약의 모든 내용을 아우르며, 회관의 건립에 참여한 모든 길드들의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즉, 이 회관은 기독교 역사와 베네치아 지도층의 동시대적 맥락이 통시적/공시적으로 통합되는 지점이며, 위대한 베네치아 화파의 과도기적 정점에 서 있는 한 천재의 모든 전성기적 기량이 집약된 공간이다.

참고로, 내가 베네치아를 방문한 올해는 틴토레토 탄생 5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여러 장소에서 많은 특별전과 행사들이 기획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틴토레토의 대표작들을 집약적으로 볼 수 있었고, 이 기회는 한 대가와 인격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였기 때문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 이번 산 로코 대신도 회당 방문은 그 인연의 서막이었다.

크기변환_DSC06855.jpg

틴토레토의 전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첫 젤라또를 먹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크기변환_DSC06857.jpg

크기변환_DSC06858.jpg

크기변환_DSC06856.jpg

1층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로운 전시가 시작되었다. 틴토레토의 <성모 마리아의 묵상(1582-1587)>과 <편지를 읽는 성모 마리아(1582-1587)>의 복원 작업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획이었다. 두 마리아가 마치 거울을 대고 대구를 이루듯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의 복원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복원 작업 자체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관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작품이 복원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이 기획은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 예술로 평가할 수 있으며, ‘공간의 예술’인 회화를 ‘시간의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실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미술관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복원, 보존, 연구는 더 이상 골방의 아뜰리에나 실험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람객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통찰이 도출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작품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기획이었다.

크기변환_DSC06859

크기변환_DSC06860.jpg

이제 단아한 계단을 거쳐 진정한 틴토레토의 예술 혼을 만난다.

크기변환_DSC06864.jpg

크기변환_DSC06863.jpg

크기변환_DSC06862.jpg

크기변환_DSC06869.jpg

그동안 도판으로만 만났던 틴토레토의 걸작들이 벽과 천장 사방에서 나를 애워싸는 느낌이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빠른 붓놀림, 금빛 광채, 역동적인 동세, 풍성한 음영의 효과로 마감된 걸작들인데, 너무나 많은 그 걸작들이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으니 오히려 그 개별적 가치가 격하되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사방을 거닐며 틴토레토의 붓놀림과 탁월한 구성력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지만 하나의 작품에 온전히 집중하기 쉽지 않다.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작품이 나의 시야에 개입되며 유혹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부터는 작품을 하나씩 떼어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멈추고 그저 벽면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이곳에 존재하는 시간 자체를 즐기려고 했다. 그저 이 금빛 찬란한 회화와 장식의 대기 속에 그냥 나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들은 늘 이 곳을 지키고 있을태지만 내가 이 곳에 존재하는 순간은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현존성을 즐기려 했던 것이다.

천장화를 감상하는 관람객을 위해서 커다란 거울을 여러 개 비치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들고 다니면서 목이 아프지 않게 천장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관광객 티가 나는 것 같다는 알량한 자격지심이었다.

크기변환_DSC06861.jpg

그 유명한 <십자가형(1565)>은 별도의 공간에 한 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높이만 5미터, 너비는 12미터가 넘는 이 대작은 벽면 전체에서 엄청난 힘을 발산한다. 좌우의 수많은 인물들은 대칭을 이루지만 각자가 뿜어내는 개성적인 용모와 움직임에 의하여 전혀 단조롭지 않다. 어두움을 뚫고 중앙에서 금빛 광채를 내뿜는 예수는 이 모든 존재들의 죄를 떠안고, 이 모든 부산스러움과 대조적으로 고고한 존재감을 내비친다.

크기변환_DSC06867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66.jpg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75.jpg

틴토레토에 빠져서 나무 장식들을 놓치면 곤란하다. 프란체스코 피안타(Francesco Pianta)가 1657년부터 1676년 사이에 제작한 이 나무 장식들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가득차 있으며, 이 회관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켈트 미술의 책 장식을 연상케 하는 복잡한 문양은 이름 없는 장인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경이로운 책장(The Marvellous Bookshelves)> 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보라! 단순히 책장을 묘사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오래되고 낡은 책의 질감과 때로 뒤집어서 책을 꽂아 놓는 얄궂은 이들에 대한 원망섞인 현실감까지 그대로 표현한 저 미감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크기변환_DSC06884.jpg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89.jpg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896.jpg

크기변환_DSC06898

크기변환_DSC06903

크기변환_DSC06912

ed81aceab8b0ebb380ed9998_dsc06914.jpg

크기변환_DSC06915

크기변환_DSC06917

산 폴로 대신도 회당을 나와서, 첫 밤이 저물어가는 것을 아쉬워 하며 무작정 걸었다. 유심칩 구매, 카 도르, 카 페사로,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산 로코 대신도 회당으로 이어진 베네치아 미술여행 첫 날의 숨가쁜 일정은 2만 4천보를 걷는 대여정이었다.

크기변환_DSC06916.jpg

그렇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것 같다. 운하의 작은 지류를 바라보며 까르보나라 한 접시로 육체의 무리함을 보상했다. 애석하게도 맛은 별로였다. 계산서가 들어 있던 접시를 깨먹어서 몹시 미안했다…


  1. 일부 도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며, 장비는 Sony RX10 MK3이다.
  2. 작가 및 장소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였다.
  3. 딱히 대단한 컨텐츠는 없지만, 그럼에도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한다.

[베네치아 미술여행] 1일차(2/2) –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산 로코 대신도 회당”에 대한 답글 1개

Add yours

  1. 첫 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곳을 다녀오셨네요. 자세한 여행기록에 꿀팁까지.. 넘나 잘 읽었어요. 나중에 미술 여행기 책이 발간 되는 건 아닌지^ ^

    Liked by 1명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WordPress.com.

위로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