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팅을 말하다: 전문가 29인이 바라본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승보 엮음)

미술과 非미술의 구분은 ‘미술계’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미술제도 입장의 최전선에 미술관과 전시가 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라도 미술관에 가져다 놓고 ‘보릿자루는 내면의 정화를 상징하고 꿔다놓는 행위는 상호호혜적 공동체로의 희구를 상징한다.’ 는 둥 그럴싸한 설명을 붙이면 미술작품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미술제도의 힘이다. 이 책은 그러한 미술제도의 최선전인 미술관과 전시, 큐레이팅이 어떠한 과정으로 성립되었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29명의 저자가 쓴 글을 모았다.

이 책을 쭉 훑어보면 동시대 미술제도가 직면한 고민과 앞으로의 방향이 대략 보인다. 키워드로만 정리하면, 다원주의, 권력이양, 공동체, 정치적, 디지털 리터러시, 신기술, 지역사회, 행동주의, 자율성, 독립성, 실천, 비평적 입장 등이다. 큐레이팅은 순백의 전시장에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지닌 작품을 그저 걸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이래로 큐레이팅은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2, 3의 작품을 창조하는 가능성까지 열었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는 더 이상 작가가 의도한 하나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접한 작품들, 관객들, 지역 사회와 공동체, 권력의 상충 속에서 현 시대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담론들을 활성화하거나 생산한다. 그러한 전시의 확장된 가치 속에서 역시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일선 큐레이터들의 손에 들려 있다. 큐레이터가 연구실에서 고민하고, 열람실에서 자료를 찾고, 작품을 섭외하고, 전시기획서를 작성하고, 협찬사에 아부하고, 전시장에 못을 박는 그 시간들이 모여 전시의 살과 뼈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29명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한 역할의 막중함에 관하여 입을 모으며 큐레이터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격려와 지지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을 수반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사례와 방향성 제시에서 끝난다. 큐레이터 지망생이 이 책을 2번 정독해도 ‘좋은 큐레이터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큐레이터는 어느 정도 이론을 다룸에도 미술사가나 비평가에 비해서는 현장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큐레이터의 승부는 현장에서 판가름된다. 전시장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 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그 얼굴빛의 루멘(lm)이 곧 큐레이터의 성과평가 지표이다. 그 루멘을 높이는 법에 대해서 누가 감히 최종적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자전거를 움직이는 방법과 달리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아니, 할 말은 많더라도 꼭 들어맞는 말은 없는 법이다.

다만 내 이야기로 들어와 보면 한 가지 답은 분명해진다. 그 답은 나 같은 인간은 큐레이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게 연구에 필요한 끈기와 사고력이 없느냐, 관장 혹은 후원기업과 커뮤니케이션할 능력이 없느냐, 전시기획서 작성을 위한 기획력이 없느냐, 그렇지 않다. 다만 나는 내가 싫은 것은 그야말로 꼴도 보기 싫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면 조악한 오브제에서도 어떻게든 인생의 진리를 꾸역꾸역 뽑아보겠지만 그 고역을 인내할 자신은 없다. 결국 작가든 큐레이터든 자신이 먼저 감동해야 관객의 감동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네 빈약한 문화예술 체제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에 맞서면서도 정작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따먹지 않으면 아사하기 딱 좋다. 스스로 감동한 것만 밀어붙이며 살아갈 특권은 누구에게도 수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큐레이터가 될 수 없고, 그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29명의 저자가 한 꼭지씩 쓴 선집이기 때문에 전체를 관통하는 평가는 내릴 수 없다. 다만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서 도판은 일체 넣지 않은 모양인데, 전시나 건물 사례 등의 언급에서는 도판을 넣었어야 했다. 여기 이름을 올린 저자들은 사실상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여러 저자들의 글을 단 시간에 읽다 보니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역량이 확연히 드러나서 재미있다. 예를 들어, 외국 학자만 줄줄이 늘어놓는 글은 상당히 따분하다(김희영). 실체 없이 뜬 구름만 잡는 이야기를 중언부언 반복하는 글도 마찬가지다(백령). 기본적인 우리말 문장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더럽게 못 쓴 글도 눈에 띈다(정연심). 우리 인생에서 이런 글들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역시 우리가 읽고 싶어 하는 글은 저자가 신념을 담아낸 진실한 자기만의 이야기, 그리고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이다. 반이정의 신생공간에 대한 고찰은 그동안 대안공간이 말단이라고 생각했던 내 일천한 지식을 확장시켜 주었다. 사실 어느 시점의 ‘현대’가 1500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중세’로 불리듯, 지금의 신생공간도 대안공간의 맞은편에서 그 차별적 의의가 드러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둘 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 모종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들이 동시대 미술계를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필주는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에 예술 작품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나도 연구를 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구글북에서 스캔된 원문을 만나고, 심지어 그 책이 내 곁에 없음에도 엄연한 참고문헌으로서 기재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구하기 힘든 책들을 스캔해 놓은 익명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었다. 구글은 책과 예술 작품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면서 공익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광고업으로 먹고 사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믿을 수 없지만 설령 지금 100% 공익적/중립적으로 아카이브가 구축되었다고 할지라도 구글이 나중에 어떻게 검색 알고리즘을 변화시킬지, 어떻게 노출 양태를 통제해 나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 구글과 우리 사이에는 인류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수준의 엄청난 정보 비대칭이 놓여 있다. 구글을 통해서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소장품 하나하나를 고화질로 만나 볼 수 있는 지금, 구글이 예술의 가치 변화와 인류의 문화소비에 가져올 파급효과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대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맨 마지막 필자인 김윤정이 구글 아트 앤 컬처 프로그램 매니저라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는 구글의 디지털 아카이브 덕분에 대중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혁신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만을 보여준다. 물론 구글은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창작의 영역에서도 전혀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김윤정은 정필주가 품고 있는 의구심, 즉 구글이 모든 정보 노출과 인터페이스를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수정하고 사용자들을 교묘하게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을 한 곳에 불러 놓고 격렬한 논쟁을 붙여 보고 싶다.

대한민국 1호 큐레이터로 불리는 윤범모는 신선하게도 자문자답 형태로 큐레이터라는 직업의 본질과 동시대 미술제도의 난맥상들을 짚어주는데, 자신의 생생한 경험들이 결부되어 흥미롭다. 큐레이터라는 직업 자체가 없던 시절에 전시를 기획하면서 세상의 오해와 맞섰던 이야기들은 그가 한국 현대미술사라는 서사와 얼마나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자서전 형태로 한국 현대미술을 회고하는 책을 쓰셔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시기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다음이 좋겠지만. 그의 글에서 “작가는 작업장을 지켜야지 왜 미술관 관장실을 탐내는가!”라는 일갈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는데,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마 후에 본인이 직접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되셨으니 참으로 공교롭다.

그밖에도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이론을 통해서 큐레이팅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조선령의 글이 신선했다. 또한 강수정의 글에서, 미술관의 실천으로서 전시는 모래알 같은 대중을 향하지만, 교육은 미술관과 뜻을 함께 하는 조직화된 관객을 지향한다는 언급이 인상적이었다. 요즘 미술관의 학술발표나 심포지엄을 참석하다보면 그 사실을 더욱 절감한다.

끝으로 김성호의 ‘자발적 비평’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자발적 비평은 보기 좋게 완결된 문장으로서의 비평이 아닌, 입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생생한 현장비평이다. 어려운 이론적 용어들과 멋들어진 미학자들의 이름으로 뒤범벅되어 행간에서 길을 잃는 청탁원고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비평하지 않고서는 못 배겨서 하는 비평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전시나 비평 모두 실천을 지향할 때, 그 접점에서 눈부신 생명력을 마주할 수 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떤 큐레이팅과 비평에 진실한 애정이 담겨 있는지를.

“당신이 미술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로젠블럼

「큐레이팅을 말하다: 전문가 29인이 바라본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승보 엮음)”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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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ㅋㅋㅋ앜ㅋㅋㅋㅋㅋㅋ정연심 교수님 되게 유명하신분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 그글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ㅋㅋㅋㅋ신랄함에서 빵터졌네욬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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