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겸의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

올해 나의 미술사 공부에서 ‘복원’은 가장 관심을 끈 키워드였다. 지난 가을 베네치아 여행에서 스쿠올라 디 산 로코(The Scuola grande di San Rocco)에 방문했을 때 틴토레토의 작품을 전시 현장에서 복원하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틴토레토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의 일환이었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미켈란젤로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Michelangelo)’라는 복원프로젝트를 현장에서 목격했다. 피렌체 르네상스 정신 자체를 대변하는 미켈란젤로의 기념물들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복원하자는 캠페인이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만난 두 프로젝트는 미술작품의 복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깨우면서 그 과정에 참여를 요청하는 성격을 지녔다. 또한 작품을 복원하는 것은 또 다른 창작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나는 평소에도 작품의 수정과 복원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관련 주제로 미술사 연구회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었는데,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작품 복원이 전시의 주요 테마로 부각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대되었다.

베네치아 스쿠올라 디 산 로코에서 한 복원가가 틴토레토의 작품을 복원하고 있는 모습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복원가들이 조르조 바사리의 작품을 복원하고 있다. 이 복원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으로’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이 책은 보존복원 전문가 김겸의 에세이다. 저자는 국내 미술관에서 조각의 보존복원 업무를 하다가 IMF로 실직했고, 그 계기로 전문성을 더욱 키우기 위하여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쳤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주요 기관에서 보존복원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했고, 현재는 자신의 연구소를 운영하며 명실공이 국내 최고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자신의 훈련과정, 2부는 주요 업무 사례들, 3부는 전문가로서의 견해와 예술관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짧막한 이야기들은 모두 나름대로 생각할 지점들을 열어 보인다.

미술 및 유물 복원은 일반 대중들에게 생소한 영역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 작품이 벽에 걸리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나조차도 스스로 미술에 관심이 많고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고 자부했지만, 전시를 위해 배송을 마친 작품 앞에서 쿠리에, 큐레이터, 운송책임자가 함께 작품을 개봉하고 상태를 점검한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었다. 그냥 막연히 상태조사서 같은 것으로 확인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처럼 무대 뒤편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막상 찾아보려고 하면 드러나 있는 지식이 별로 없다. 이 에세이는 저자의 사사로운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보존복원과 미술계 전반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매우 풍부하게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문적인 지식과 성숙한 지혜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좋은 학습자료가 될 수 있다.

내게는 저자가 영국 유학시절에 겪었던 링컨 대성당 복원 일화가 가장 와 닿았다. 이 성당은 1311년에 완공된 이 대성당은 여타 유럽의 성당들처럼 상시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복원은 한 순간의 이벤트 성격이 아니라, 현대인과 유물이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며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외벽과 장식물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비계를 설치하고 한 면을 작업한 뒤 옆 칸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형태로 작업을 이어나가는데, 한 작업자가 자신의 최초 위치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7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작업에 투입되더라도 은퇴 전에는 최초 위치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링컨 대성당의 복원가들은 그 사실을 당연한 듯 여기며 너스레를 떨면서 오늘도 비계 위로 올라가고 있다. 또한 외벽의 부조는 인위적으로 오래된 석재와 색깔을 맞추지 않고 수 십 년,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서로 색깔이 일치하게 될 상황을 염두하며 복원해 놓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그럴싸해 보이는 눈속임 성격의 복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관광객들은 복원된 부조의 색깔이 오래된 벽체와 맞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지적하는데, 그러한 문의가 올 때마다 복원가 측에서는 복원의도를 끊임없이 설명해준다고 한다.

저자는 링컨 대성당 보존복원의 중장기적 안목을 우리나라 숭례문 복원 사례와 비판적으로 견주어 본다. 나 같은 문외한도 링컨 대성당의 사례가 등장할 때 이미 숭례문 복원의 사례를 떠올렸다. 복원의 의미는 작품을 ‘확인 가능한 최초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숭례문 복원이 그러한 의미를 온전히 실현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왔다. 우리나라는 ‘정치과잉’ 국가답게 문화유산의 복원 과정에서도 집권 세력의 입맛이 주요 고려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기왕 해야 하는 복원이라면 계획 발표도 뻑적지근하게 하고 싶고, 제막식도 하고 싶고, 임기 내에 끝냈으면 좋겠고, 기념사진도 많이 남기고 싶으니 진정으로 작품의 가치를 되살리는 복원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러한 정치과잉도 관심이 쏠리는 작품에만 국한된 이야기고,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작품들은 오늘도 수장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존복원은 규범적으로 정답이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동시대 여러 계층의 공감대와 통시적인 역사의 흐름이 한 지점에서 어우러지면서 최적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 가깝다. 저자가 이 책에 녹여 놓은 보존복원의 지식과 지혜가 일반 대중에게도 널러 퍼져서 소중한 문화유산과 예술의 가치가 더 깊고 풍요롭게 후세에 전달될 수 있는 토양이 되기를 바란다.

김겸의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에 대한 답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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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시간을 복원하는 분들이로군요. 거기에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를 것을 예상하고 작업하니 시간을 쌓는 것 같기도 합니다.
    숭례문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원님 송덕비 세우듯 이뤄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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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원된 부분과 원래 있던 부분이 100년쯤 뒤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것을 감안하면서 복원을 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 저변의 공감대가 필요하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런 공감대를 위한 작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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