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산과 들을 누비며 제주의 자연을 폐부 깊숙히 이식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운송수단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나의 육신에 이상 신호가 들려온 것은 여행 중반부가 지나던 시점에서부터였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제주도립미술관을 찾았다. 원래 제주도립미술관의 모던하면서 도도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 섬에 올 때마다 잠깐씩 들르긴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첫 번째 제주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다는 근사한 핑계까지 더해졌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주비엔날레 2017’은 ‘투어리즘’이라는 주제로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제주시원도심, 서귀포시원도심, 알뜨르비행장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나름대로 안착한 광주비엔날레 이래로 각 지역마다 주요 컨벤션과 국공립미술관을 연계한 비엔날레를 기획하여 관광 콘텐츠로서 자리매김하고 지역의 문화적 이미지를 드높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제주비엔날레도 그러한 지역 비엔날레들의 아류작 중 하나일지 모른다. 반복되는 시도들은 ‘비엔날레’라는 단어가 지니는 파괴력과 신선함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귀결되기도 했지만, 몇몇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영화제 붐이 각 지차체 문화관광과의 역점 사업이었다면, 시각예술의 저변이 확장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비엔날레는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예술적 축제’들을 통합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폭제, 혹은 플랫폼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제1의 관광도시 제주도의 첫 번째 비엔날레는 향후 문화예술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는 많은 지자체들에게 중요한 사례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하나의 티켓으로 도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모두 이용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현대미술관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제주비엔날레 경험은 도립미술관 한 곳에만 국한되었다.
투어리즘은 첫 번째 제주비엔날레의 주제로서 누가 봐도 매우 적절하다. 제주도에 있어서 관광은 지자체의 존립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자에 불과한 나에게 조차 ‘지금이 투어리즘이면 제2회 주제는 도대체 뭐로 할거야?’라는 위기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전시는 주제를 살려 각 국의 촉망받는 예술가들이 출품한 관광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그간 관광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간단히 훑어보고, 관광의 활성화에 따라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관광에 있어서 어떠한 새로운 이슈들을 야기할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야심찬 첫 제주비엔날레건만, 제주도 자신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제1전시장의 벽면을 가득 매운 한라산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한라살롱). 하나의 대상을 여러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를 유발한다. 다양함 속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상호 간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는 즐거운 놀이가 된다. (나는 공유할 상대가 없어서 아쉬웠다…) 2층에서는 1층의 한라산들을 바라보며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감상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시청각의 예술적 경험을 조화시킬 수 있는 참신한 구성이었다.
VR을 통해서 가상화된 관광지를 탐험할 수 있도록 만든 시도도 훌륭했다. 마르코스 노박의 <4중주:가상 관광:발췌>는 제주도에서 영감을 받은 가상화된 3차원의 세계 속으로 VR 장비를 착용하고 직접 들어가 보는 인터렉티브 작품이다. 도대체 이 가상세계의 어떤 부분이 제주도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묻고 싶지만 그러한 소외감은 작가가 의도한 핵심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이 시사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에 따라 관광의 가상화는 가속화될 것이며, 점차 가상과 현실의 구분 조차 의미 없어 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상화를 막고 현재를 붙잡으려는 노력들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오히려 가상화의 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가상세계를 우리 자신의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고민이 될 것이다.
제주올레가 출품한 <길위를 걷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올레길을 탐방하는 영상을 촬영하고, 관람객은 안마의자에 앉아 그것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현태의 작품이다. 최근 업계에서 가장 공격적으로(약간은 키치적으로 꼴보기 싫게)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는 B사로부터 안마의자 3개를 공식 협찬 받은 이 작품은 자연 속에서의 휴식을 시각적으로 공유할 뿐만 아니라 물리적 휴식 경험까지 동시에 향유하게 한다. 예술에 자본이 투입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각은 여전하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은 온당치 않다. 천문학적인 재원을 바탕으로 한 메디치의 컬렉션이 인류의 문화예술 역사에 얼마나 큰 획을 그었는지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자본과 예술의 창조적인 결합은 새로운 미적 경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B사는 전시용 안마의자 3개로 미술관이라는 도도하고 생경한 장소에 스스로의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각인시켰다.
이번 제주비엔날레의 대표적인 단 한 장소만을 스치듯 훑어 보았기에, 비엔날레 전반을 평가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에 대한 인상을 정리하자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예술계, 특히 각종 비엔날레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인터렉티브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매우 적었고, 퍼포먼스는 전무했다. 제주도의 특성상 관람객의 유동 격차가 크기 때문에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이해하나, 특별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공지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이 정적이 언제 깨질지 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기 보다는 축제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전시를 찾은 초심자들에게는 그저 이색적인 셀카존으로서의 기능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안타까웠다. 축제를 축제답게. 그런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18.4.18.) 스쳐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본 제주비엔날레는 이러하였다. 그 전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좋은 칼럼이 있어서 복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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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비엔날레는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신생의 팡파르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비엔날레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대체로 정치적 논리에 매여있다. 좁은 국토에 너무 많고 개성이 없으며 예산 낭비가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엔날레의 행진이 계속되는 이유는 정신문화 비전의 시대에 비엔날레를 대체할 대안이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는 국가 혹은 지역 간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인 동시에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실험실로 작동해왔다. 비엔날레 무용론자들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비엔날레의 본성이 무용한 것이 아니라 비엔날레를 운영하는 주체로서 조직과 운영 체계가 아직도 미숙하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주지하듯 비엔날레의 기능과 역할은 미술관의 그것과 다르다. 비엔날레가 미술관 전시와 별도로 100년 이상을 존속해 오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경화된 제도와 규범에 대한 도전과 문화 개혁의 실험실로서 비엔날레를 말할 때 우리는 전설적 큐레이터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36세가 되던 해에 8년 동안 몸담았던 미술관을 떠나 전세계를 무대로 150회가 넘는 전시를 기획하고 조직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기존 전시공간에서는 소화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주제와 미술사조를 전방위로 포섭했으며, 혁신적 전시방법론을 도입하며 독립큐레이터라는 개념을 창안해 내었고, 비엔날레를 시대정신이 표출되는 장으로 올려놓았다.’(한지희,「 강박의 미술관」,『 아트인컬처』, 2018.3)
최근 막을 내린 강원국제비엔날레(2.3-3.18)와 제주비엔날레(2017.9.2-2017.12.3)는 신생 비엔날레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전자는 비엔날레의 기능과 역할을 명확하게 보여준 전시였고 후자는 비엔날레가 당면한 현실적 한계를 민낯으로 드러낸 경우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을 주제로 내건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선과 악의 두 개념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주목하여 어떤 사건의 역사적 의미가 해체되고 재정립되는 상황을 정교하게 보여주었다. 주최 측은 제주 4·3과 강정해군기지를 둘러싼 분쟁을 비롯해 전쟁, 기아, 인종차별, 여성억압 따위의 이슈가 지닌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맥락에 주목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 조직위원회를 통해 선임된 전시 총감독과 3명의 큐레이터 간의 협업과 논의의 과정이 전시를 통해 잘 드러났고,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공무원들과의 입장 차이를 조율해 온 기획력의 성숙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주비엔날레는 권력에 충성을 보이는 전시였다는 점에서 아쉽다. 주최 측이 내세운 주제인 ‘투어리즘Tourism)’은 관광지 제주의 도정에 바치는 공허한 헌사였다. 일년도 안 되는 무리한 준비 기간과 도립미술관 중심의 폐쇄적 조직, 그리고 문화계와의 소통이 배제된 운영방식으로 추진된 비엔날레는 ‘최악의 비엔날레’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비엔날레를 바라보는 도 내외 언론의 반응은 냉담했고 도내 미술인들의 태도는 무관심 자체였다. 제주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 등의 기관에 힘입어 출범에는 성공했으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비엔날레가 지켜야 할 권력의 시선으로부터 팔거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1회 행사를 마친 제주비엔날레는 실험대 위에 놓여 있다. 제주비엔날레의 미래는 비엔날레의 조직과 운영 방식의 독립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비엔날레가 해당 지역 관료들이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종이 되어서는 건강한 미래가 없다. 비엔날레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동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문화적 쟁의장치가 되어야 한다. 제주비엔날레가‘저예산으로 작고 강한 비엔날레’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비엔날레의 본성과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 김영호(1958- ) 파리1대학 미술사학 박사.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시 총감독,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 커미셔너, 모스크바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현대미술학회 회장,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역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 제1회 문신저술상 대상 수상. 현 중앙대 교수.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http://www.daljin.com/?WS=31&BC=cv&CNO=314&DNO=15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