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끝없이 복잡해지는 속성을 지닌 현실을 끝없이 단순해지는 속성을 지닌 글 속에 어떻게 옮길 것인가?”
185p

나 대신 울어줄 이 하나 없다. 그러니 여기에, 이렇게, 오늘도 쓴다.

살다 보면 너무나 절묘한 시점에 어떤 책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인생의 궤적이 한 권의 책과 공명하며 기묘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절묘한 찰나를 눈치챈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이 몇 명의 손에 들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단박에 자신할 수 있다. 이 책을 나만큼 적확한 시점에 읽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특수한 경험을 하면서, 바로 그 책에 우연히 손이 닿아 본 사람만이 안다. 그때 한 권의 책, 그 안에 한 줄의 문장은 언뜻 순탄해 보였던 인생의 항로에 불쑥 밭다리후리기 같은 묵직한 시비를 건다.

박사학위 논문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고 심사를 받으며 심난한 와중에 서고를 거닐다가 논문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기성 인문학계에 경종을 울린 어느 자의식 넘치는 철학자의 책을 마주할 확률이 어느 정도나 될까. 그날따라 이상하게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집어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이것저것 들쑤셔 보았으나, 넷플릭스 최상단 추천 목록마냥 하나같이 시시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 묵직하고 연노란 책이 지가 응당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다소 엉뚱한 곳에서 다른 책들과 다소 거리를 둔 채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집어 들었다. 철학하신다는 양반의 글쓰기론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 슬쩍 떠넘겨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잔뜩 날이 벼린 문장 몇 줄이 금세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요즘 보기 드문 기운이었다. 그래서 냉큼 집어 왔다.

주장의 핵심은 논문중심주의 타파, 일리의 철학, 그리고 잡된 글쓰기다. 저자의 주장을 나의 불온한 언어로 풀어보면,

◈ 논문중심주의

논문을 써서 먹고사는 소위 지식인 또는 식자층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비판적 사고가 습성화된 것은 아니다. 대체로는 그냥 시키는 대로, 남들 하는 대로 그럴싸한 논문만 줄창 써대며 평생을 먹고살아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그럭저럭 행복하게 잘만 산다. 그게 문제는 아니다. 그건 그들의 사는 방식이고, 누구에게도 딱히 큰 손실을 끼치지 않는 그러한 행복추구권은 응당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고,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논문을 써서 먹고살겠지만,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문제의식은 첫 논문을 쓰던 십수 년 전부터 변함이 없었다. 당시 내가 줄곧 지적받았던 대목은 연구모델을 구성할 때나 실증분석을 위한 측정 도구를 개발할 때 내 머릿속에서 자의적으로 창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학계의 공인된 이론이나 이미 검증이 완료된 선행연구의 전범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이 원칙이 너무나 갑갑하게 다가왔고, 이런 비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내 눈으로 이 세상을 관찰하다 보니 무언가가 궁금해졌고, 그에 따라 가설을 설정해 측정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현상에 대해 그 어떤 대가도 앞서 말한 적이 없거나, 그 현상을 나보다 먼저 검증해 본 그 어떤 연구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검증하려고 시도조차 할 수 없다니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도대체 언제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상호텍스트성의 함정 아닌가?

물론 십수 년간 학술계의 변두리에서 아득바득 기어다니고 나서 약간은 노회해진 지금 시점에서는 안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문제의식이란 없음을. 살짝 빗나가는 이론이나 선행연구도 광의적으로 (그리고 비굴하게, 잘) 꿰어맞추면 나의 가설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런 잔머리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탐색적 연구’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덧씌우면 된다는 것을. 하지만 처음으로 학술계 한 귀퉁이에 발가락을 담그고 인생의 항로를 저울질했던 그 애송이 단계에서는 ‘검증된 것만 검증하라’라는 명령이 참으로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남이 이미 차려 놓은 밥상에 대한 논평만이 허용된 세계라니, 여기에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은 걸까? 앞으로 이 세상 그 어느 고원에도 내 이름 석 자가 첫 번째 깃발로 나부끼는 곳은 없겠구나!

나 자신이 이런 성장통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기에 저자가 제기한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골수 마디마디마다 절절히 파고들었다. 저자는 논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논문이 학술적으로 공인된 유일한 글의 형식이라는 사고에 대한 경직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논문은 오늘날 학술계에서 독재적 양식이고, 이 형식이 우리의 사고 형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논문은 서구 근대 과학기술 혁명 과정에서 태동하였고, 그 배경에서부터 실증주의와 명사주의에 철저히 복무하는 양식이다. 거기에는 오직 객관적 사실만이 담겨야 하고, 그러므로 저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문체, 그리고 온갖 잡다한 사고의 흐름 따위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발화자가 없이 명사와 실증된 사실들만을 줄줄이 나열하며 견고한 학술계의 성을 쌓는 데 최적화된 형식이 논문이다.

나아가 논문중심주의는 원전중심주의와 연결된다. 논문은 실증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며 근거에 목을 맨다. 근거는 저자의 머릿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아닌 권위 있는 이름을 통해 비로소 확립된다. 그 어떤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주장도 원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것을 거스른다면 논문에 기록되기 어렵다. 원전에 반대되는 신선한 주장조차 원전의 권위를 인정하고 옹립하는 조아림 속에서만 발행이 승인된다. 원전중심주의는 권위에만 의존하는 방식이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고착이며, 내 것이랄 것이 없는 글이다. “독서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을 지경으로 늘어놓은 참고문헌들(66p)”은 “논문이란 눈치 보는 글쓰기의 전형(65p)”임을 증명한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그럴싸한 꼬부랑 이름의 참고문헌이 달려 있다면 믿음직해 보이고, 천하의 정언명령도 저자 자신의 목소리라면 출처와 원전을 재차 요구받는 것이 이 바닥의 관행이다. 고백하건대 나 자신, 그런 관행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주장인 무언가를 순전히 그 지면 위에 붙들어 둘 요량으로 수준 검증도 되지 않은 꼬부랑 이름들을 줄줄이 문장 말미의 괄호 안에 꿰어 둘 때면 헛헛한 자괴감이 회식 다음 날 숙취처럼 역류해 올라오곤 했다.

논문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는 동료 무시의 관행과 연결된다. 우리는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기술, 학문, 제도, 문화 등 온갖 영역에서 수입과 모방에 급급했다. 습득력만큼은 끝내줘서, 외견상 눈부신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덕에 이제는 문화강국 반열에 올랐으나, 미제, 일제, 구라파라면 사족을 못 쓰는 뿌리 깊은 습성은 아직도 우리네 DNA 곳곳에 그 역한 상흔을 남기고 있다. 모든 참고문헌을 영어 논문에서 끌어와야만 할 것 같은 강박도 그 습성에서 기인한다. 같은 문장으로 구성되었다손 치더라도 한국 논문을 많이 참고했다면 어딘가 불성실해 보이고, 반대로 영어 논문을 많이 참고했다면 갑자기 성실한 연구로 보인다. 영어 참고문헌 비율이 동료평가 통과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증분석을 시도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한 관행은 국적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학술계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자국 동료들을 ‘개무시’하는 처사이다.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바깥에서 수입한 권위로써 급조한 마스크를 쓰고 사는 짓(217p)”이다. 이래서야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자국의 특수성을 돌이켜볼 기회를 가질 수 없다.

◈ 일리의 철학

어떤 맥락에서나 통용되는 보편타당한 원칙이나 깨달음을 진리라고 한다. 유구한 사상사의 흐름에서 9할은 진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이제는 진리란 없음이 유일한 진리로 부상하는 실정이다. 제사장도, 황제도, 교황도, 철학자도 만고불변의 진리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들이 각각 선포한 진리는 후대의 지배적 목소리에 의해 자리바꿈 되었다. 통상 하나의 맥락에 결부된 진실은 그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 세상에는 의식을 가진 구성원의 수만큼이나 많은 맥락이 존재하고, 그렇게 서로 다른 맥락을 관통하는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진리의 반대 극점에 무리가 위치한다. 무리는 완전한 무작위의 세계다. 앎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는 상태다. 진리의 견고한 성체가 싫어서 발길 닿는 대로 광야를 떠도는 것이 무리다. 그렇게 떠돌다 객사하는 것이 무리의 끝이다.

삶은 진리도, 무리도 아니다. 복잡한 맥락을 경유하는 우리네 삶은 단순한 진리로 수렴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한한 복잡성과 우연성에 내던져져 무리의 급류를 타고 예측 가능성의 토대 밖으로 떠밀려 가지도 않는다. 복잡해 보이지만 그 안에 패턴이 있고, 패턴이 있지만 그 안에 삐죽이 돌출하는 일탈이 있다. 진리와 무리의 양극단에서 중용적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보며 더 나은 성숙의 과정으로 차분히 이끌어야 할 책무가 우리 모든 지성인에게 있다. 견고한 성체를 떠나 광야를 방황하다가 객사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느 호젓한 터에 자리를 잡고 다소 엉성할지라도 자기만의 은신처를 세워보려는 자세가 일리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가 주창하는 개념이 일리의 철학이다. 일리는 “끝없이 복잡해지는 속성을 지닌 현실을 끝없이 단순해지는 속성을 지닌 글 속에 어떻게 옮길 것인가(185p)?”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상한 개념이다. 아무리 복잡한 사유의 과정에서 도출된 사상이라도 그것을 글로 적어 내는 순간 눅눅했던 활자가 굳어지며 단순화의 숙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식자들이 글에서 글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의 유희를 즐기는 동안 단순화된 진리는 더욱 뭉툭하고 둔탁해져 복잡다단한 생의 순간순간과 점차 멀어지게 된다. 앎과 삶이,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등을 돌리는 순간이다.

단순하게 정리된 진리가 안겨주는 명징한 쾌감과 독선의 바벨탑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상대주의로 치우쳐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편의주의에 머물러서도 곤란하다. 사려 깊은 시선과 날카로운 분석이 전제된다면, 복잡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도 일정한 경향들이 감지되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공동의 성숙을 위한 가치 지향성이나 균형적 해법이 굵직한 줄기로나마 수렴될 수 있다. 글쓰기는 그러한 일리를 읽고, 표상하고, 다그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 잡된 글쓰기

논문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를 딛고, 진리와 무리의 양극단을 넘어 오늘날 인문학의 글쓰기는 오히려 잡스러워져야 한다. 잡된 글쓰기는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와 개성이 역력히 묻어나는 글쓰기다. 저자와 동시대인들의 체화된 감각이 담뿍 묻어나는 글쓰기, 여러 지평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저자가 발 디딘 맥락의 구체성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쓰기, 맥락의 역동성 가운데서도 무조건적 상대주의로 치우치지 않고 일리의 균형점에 다가서는 글쓰기다.

과학적 원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읽히지 않는, 아니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인문학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식자들만의 자위기구일 뿐이다. 독자의 삶이라는 토양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기어코 성숙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지식 수입업자들만 판치는 논문도, 대가의 이름만 빌려와 싸구려 위로로 버무린 대중서도 적절한 글쓰기의 형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땅의 현실과 맞닿은 복수성과 복잡성을 바라보며 잡스러운 이야기(서사)와 비평으로 묵묵히 쌓아 올린 글쓰기의 여정만이 오늘날의 과학적 글쓰기 독재 체제에 균형적 생채기를 낼 유력한 대안이다.

혹독한 일정 속에서도 틈틈이 700여 쪽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니, 내가 평소에 거칠게 주워섬긴 생각들,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다짐의 문턱만 맴돌던 주관들, 버릇처럼 써 내려갔던 상투적이고 설익은 결론들이 저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기획해 왔던 글쓰기 철학의 자장에 거의 포섭됨을 알게 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글쓰기와 거기서 창출된 결과물을 유통할 낮은 문턱의 장이 필요함을,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라 매력적인 흡입력과 날카로운 식견을 갖춘 이야기꾼임을 주장해 왔고, 이 글쓰기 공간도 그런 주관을 실천할 헛헛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논제나 계기에 결부되지 않은 나만의 글쓰기론을 별도로 정리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 정도의 자의식과, 그 자의식에 상응하는 실력과, 그 실력에 상응하는 고정 독자층이 없다. 앞으로도 별도로 정리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이미 저자가 오랜 시간 숙고를 거쳐 나 대신 정리를 해준 셈이니.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논문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를 박살 내기 위해 나부터 솔선수범하여 잡된 글쓰기의 게릴라 정신으로 무장하고, 전업 ‘방구석 이야기꾼’ 혹은 ‘방구석 비평가’로서 삶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용기도, 실력도 없다. 식솔과 주택담보대출은 있다. 로또 1등에 필적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의 변수가 개입되지 않는 한, 아마 앞으로도 어떻게든 논문중심주의의 생태계에 빌붙어 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로의존성은 해가 갈수록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전혀 다른 삶이라는 가능성은 나날이 희뿌예진다. 광야를 내리쬐는 햇살은 나날이 열기를 더하고, 오아시스마저 말라버렸다는 흉흉한 소문만이 성문 안팎을 오간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관에서 꽤 실력자 축에 속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따금 제도를 부수고 싶지만, 그래도 내게 헛박수나마 쳐 주는 곳은 여기뿐이다. 결국 돌고 돌아 제도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게 제도만한 애증의 대상이 없다.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한 끗 차이다. 양자는 습자지 같은 틈바구니로 서로를 노려본다. 그 틈에서 이력서에 말끔한 한 줄로 반짝거리는 논문도 나오고, 바로 이 글처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위 뻘글도 튀어나온다. 이 두 가지 층위 모두 내가 오롯이 소화한 눈물과 웃음과 회한의 소산이니, 이 또한 정신분열적 동시대성의 징후로서 기꺼이 품을만한 논제가 아닐까. 내가 아니면 누가 품겠는가. 이 공간이 아니면 누가 실어 주겠는가. 나 대신 울어줄 이 하나 없다. 그러니 여기에, 이렇게,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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