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브루노 레더의 「세계사형백과: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Karl Bruno Leder, Todesstrafe: Ursprung, Geschiche, Opfer

사형에 사형을 선고하라

천인공노할 범죄 앞에서 ‘닥치고 사형’을 외치기란 쉽다. 거기엔 단기적으로 어떠한 비용이나 희생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제도적 살인인 사형이 사회 구성원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과 의미에 대해서, 나아가 그 제도가 확립된 과정과 온갖 시행착오에 대해서 숙고하기란 어렵다. 카를 브루노 레더(Karl Bruno Leder)는 그 작업을 제법 성실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해냈다. 그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사형이란 효과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늘 그렇듯, 1986년 출간된 원서의 원제는 담백하다: 「사형제도: 기원, 역사, 희생자」. 1991년도 국내 번역판에서는 마치 이 책이 사형의 모든 것을 다루기라도 한 듯 ‘백과’라는 막중한 지위를 부여했다. 실상 백과의 지위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사형의 인류사적 기원을 다루고 있으나, 그나마 연구가 이루어진 일부 대륙의 사례들을 큰 틀에서의 공통 분모로 엮은 것에 불과하다. 고대와 근대로 나누어 다양한 사형 방법을 유형별로 조망한 방식에는 설득력이 있으나, 여기서도 서유럽과 북미가 중추적 기준을 제공하고 있고, 특히 저자가 속한 독일어권과 사형 선진국(?) 프랑스의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룬다.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 제3세계라고 할만한 대륙의 사형제도는 눈길을 사로잡는 이국취향이나 인류의 여명기를 시사하는 ‘미개’한 사례 정도로 취급되었다. 책 속에 실제로 여러 번 등장하는 ‘미개’라는 용어가 거슬릴 수 있지만, 저술 및 번역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만한 계제는 못 된다. 요약하자면,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세계’도 아니고, ‘백과’도 아니다. 그럼에도 권력이 합법의 탈을 쓰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들을 이토록 폭넓게 조사하여 풍부한 시각 자료와 함께 제시한 사례가 1991년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을 터이니, 당시의 기준으로는 ‘준세계’나 ‘준백과’를 표방했더라도 그럭저럭 용인할 만한 수준이었으리라 참작할 따름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책을 집어 드는 사람의 심리 저변에는 엽기적인 사형 방식의 다채로움과 변천을 향한 앎의 욕망,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각 시대의 풍부한 시각 자료에 대한 관음증이 깔려 있다. 설령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그렇다(진짜 사이코패스라면 오히려 사형 장면에 대한 관음증이 보통 사람들보다 덜할지 모른다. 그들을 굳이 남의 행동을 훔쳐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부인하겠는가. 누군가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만약 그것이 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는 궁극의 스펙터클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나의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그것을 아끼는 만큼 남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안다.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죽음의 광경에 사로잡히는 심리를 추동한다. 동시에 그와 같은 비극이 나에게 벌어지는 일만은 막고 싶은 예방과 학습의 기제도 작동한다. 오늘도 수천수만의 시청자가 극장과 넷플릭스 앞에서 무수한 죽음의 사례들을 학습한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교통사고 현장에 그토록 집착하며 숱한 작품을 남겼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사형은 목숨의 막중함을 앗아가는 여러 경로 가운데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포장된 행위다. 죽음의 스펙터클을 응시하는 것은 죽음을 야기한 행위만큼이나 본능적 죄책감을 유발하지만, 그것이 합법적으로 포장됨에 따라 응시의 죄과가 의식의 수면 위에서만큼은 일시적으로 면죄된다. 그러니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인류가 자각을 갖추기 시작한 역사의 여명기에 여러 공동체에서 유사한 사형제도가 발달했으리라는 추정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인간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너무나 무기력했다. 천재지변, 맹수의 습격, 원인 모를 전염병, 부족 간의 충돌과 살육 등 그간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범주 안에서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위협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의지할만한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 희망을 걸어볼 만한 강력한 대상이 필요하다. 천체를 주관하는 강력한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함께,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물질을 영혼이 깃든 주체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신념 체계가 널리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러한 애니미즘의 세계관 속에서 부정, 금기, 기복, 염원 등 지구 생명체 가운데 오직 인류만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고도의 종교적 의식이 싹트게 된다. 여기서 금기를 거슬러 부정을 가져오는 존재나 신의 명령에 거스르는 존재에 대한 강력한 응징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발아한다. 그래야만 공동체가 오랜 시간에 거쳐 가꾸어온 금기의 체계가 한순간에 와해되어 무정부 상태로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 그래야만, 신적 존재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신성한 권력이 여전히 신-인간 사이의 매개자로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이 사형의 합법화로 이어진다. 씨족 및 마을 공동체가 발전해 국가의 위용을 갖추게 될 때, 국가가 개인이나 공동체로부터 위임을 요구하는 최초의 권력 중 하나가 바로 피의 복수이다(40p).

사형은 문명의 여명기에 피의 복수와 인신공양으로부터 출발해 근대국가에서 제도화되어 합법의 탈을 쓰게 되었다. 금기를 어긴 존재, 나와 우리 공동체에 피해를 끼친 존재를 처단하는 방식이 피의 복수라면, 인신공양은 공동체에 피해를 가져올 잠재적 싹을 자르기 위해 순결하고 정결한 존재의 목숨을 신적 대상에게 바치는 것이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거래적 관점에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나, 목숨 외에는 가진 것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순결한 처녀나 어린아이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종교적 의례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의식 수준이 함양됨에 따라 순결하고 귀한 목숨을 계속 바치기에는 저항이 따랐고, 대안으로 고려된 것이 피의 복수를 인신공양에 접목하는 체계였다. 어차피 죽여 마땅한 사형수를 제물로 삼아 공동체의 안녕까지 기원하겠다는 일견 효율적인 발상이다. 이에 따라 인신공양은 형해화되었으나, 타자의 죽음을 계기로 나의 죄를 씻고 안녕을 빌어 보겠다는 기복의 심리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사형제도에 들러붙게 되었다. 단두대에서 공개 처형된 사람의 피나 사형 집행리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광장에서의 공개처형이 지역 전체의 축제처럼 여겨질 만큼 어마어마한 관중 동원력이 있었던 까닭도, 유흥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당시의 시각적 스펙터클이라는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제도적 살인의 현장에 내 죄까지 얹어 함께 일소하고자 하는 욕망까지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타부를 신성시하면서, 그것을 어긴 존재를 강력히 응징해야 한다는 집단적 요구는 개개인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거의 집단 광기 수준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타부를 어긴 이에 대한 응징의 욕망은 실상 그 타부를 어기고 싶은 자기 내면의 강력한 충동과 맞닿아 있다. 강간, 근친상간, 간음, 미성년자 추행 등 성적 금기에 대해서는 민족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하고 잔혹한 형태의 처형이 적용되었던 사례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누군가의 억압된 죄책감을 타자에 뒤집어씌운 후 일거에 해소하는 전형적 ‘피의 복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43p).

제도의 틀에 맞추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강력한 복수의 욕망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모두에게는 생동하는 욕망이 있고, 울분을 토해낼 대상이 필요하고, 억압한 욕망에 대한 보상이 찾아올 날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제도 순응적인 존재는 그 모든 욕망을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억눌러 오기만 했는데, 반대로 누군가는 무모하게도 그 욕망을 실행해 버리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억울함과 허탈함이 분노로 바뀌어 심연에서 끓어 올라오는 것이다. 그들이 목 놓아 사형을 외치고, 단두대 앞에 모여 피의 향연을 즐기게 된다.

억압은 애꿎은 피의 복수를 부른다. 중세 마녀사냥의 광풍도 자연스러운 동물적 욕망을 과도하게 억제했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상적 유희가 억압된 채 종교적 의무, 노역, 징병, 납세만이 강요된 음울한 환경 속에서 마녀나 주술사가 활개 치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심지어 악마와 문란한 교접을 즐기고 있으리라는 심증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어처구니없는 피의 복수는 그러한 집단심리적 배경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못 하는 것을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하고 있다면 그보다 분노스러운 것은 없으며, 그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온갖 합법적 수단을 총동원하기 마련이다. 제도는 이와 같은 복수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이 아닌, 건전하면서도 지속성이 보장되는 욕망의 배출구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회에는 구성원들이 분노와 욕망을 합법적으로 배출할 수 있도록 적절한 오락 수단이 갖춰져야 한다. 존경받는 권력보다 오래가는 것은, 숨어있는 증오를 잘 억제하는 권력이다(258p). 또한, “새로운 망상 체계의 맹아와 그 성장을 일찍 저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살인의 에너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238p).” 그러니 사형수에 대한 울분이 가시지 않는다면, 집단적 성토의 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돌이켜 봐야 한다. 내가 먼저 저지르고 싶었던 무언가를 그가 선수 쳤기에 분노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애써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분노로 바뀌어 그에게 투사된 것은 아닐까? 그저 죽음의 스펙터클을 관조하고 싶은 욕망은 아닐까?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혼자만 낙하산을 펼치려는 누군가의 목덜미를 붙잡아 기어코 함께 종지부를 찍으려는 심산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실질적인 사형 폐지 국가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나 역자(판사 출신 변호사로,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장 등을 역임하였음)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형의 비윤리성, 비효율성, 비효과성, 그리고 실질적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사형 폐지는 어느새 국제 규범의 일종이 되었다. 우리는 인권이나 권력의 정당성과 같은 명분 차원에서도 사형을 폐지했지만, 국제적 교역상의 불이익을 피하려는 경제성 및 실용성 차원에서도 사형을 폐지했다. 천인공노할 범죄 앞에 ‘왜 저런 무뢰한을 살려둬야 하느냐’, ‘왜 죽이지 않고 세금으로 호화롭게 밥을 먹이느냐’와 같은 여론이 정기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이러한 대중적 분노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포퓰리즘이 사형을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이 되어 선거판을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상식 있는 대다수 시민은 우리 공동체가 사형 집행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변화는 불가역적이다. 우리가 사형 집행국으로 되돌아가려면 최소한 권위주의 군부 쿠데타나 종교혁명이 벌어져 현존 헌법 체계가 완전히 뒤집히거나, 북으로부터 적화통일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사형 폐지 국가에 걸맞은 사법 체계와 교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거쳐 현재 사문화되어 있는 사형제도 자체를 헌법 불일치로 명확히 규정하고, 사법적 판결의 범위에서 제외해야 한다. 사형을 판결할 수 없는 사법의 틀 위에 체계적인 교정교화의 원칙을 정립하고, 범죄 및 개인 유형에 따른 단계적 교정 마일스톤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어찌 보면 가장 손쉬운 사법적 응징이다. 사형이라는 최종 심급 아래 더 이상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필요도 없고, 범죄자를 애써 교화시킬 필요도 없다. 죽이면 끝이다. 이토록 간편한 응징 수단이 비록 실행은 되고 있지 않으나, 엄연히 판결의 선택지로서 살아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상상력은 그것이 없는 세계에 차마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없어져야만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의 물안개 속에서 구체적 실천의 제도들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 땅의 권력자, 지식인, 관료들에게 사형이 없는 사법제도를 상상해야만 하는 계기가 어느 날 불현듯 강제로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대체적 교정교화 방안들이 강구될 것이고, 그 가운데 집단지성을 통해 최선의 무언가가 선택될 것이다. 사형이 합헌인 이상, 우리는 사형 너머를 상상할 수 없다.

이 사회에는 여전히 피의 복수와 인신공양의 전통이 뿌리 깊게 새겨져 있고, 모든 갈등과 분노를 잠재울 만능열쇠로서 희생양의 피를 갈구하는 목소리는 언제든 들불처럼 피어오를 수 있다. 군중심리와 집단의식에 휩싸여 희생양을 찾으려고 희번덕거리는 수천만의 눈동자 앞에서 사형을 폐지하려는 단호한 리더십이 언젠가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우뚝 서 제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천진하다. 다른 한편,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합리적 지성도 드물거니와, 더러 있더라도 파편화된 외침으로는 시시각각으로 부화뇌동하는 여론을 거슬러 새로운 제도적 변혁의 물꼬를 틀 수 없다. 결국 실효적 변화를 창출하려면 지성이 곧 권력이 되거나, 지성을 간택하는 용감한 권력이 필요한데, 오늘날 우리네 정치 지형도에서 그런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형은 폐지되었으되, 폐지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형이라는 선택지가 없는 사법 체계 안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장기적 시계의 교정교화 원칙과 섬세한 마일스톤이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낡은 법전에만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는 사형이 실질적 교정교화의 가능성에 되레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제는 사형에 사형을 선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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