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캔델의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

빈 태생의 뇌 과학자 에릭 캔델(Eric R. Kandel)이 자신의 전공분야와 미술의 통섭을 모색한 두 번째 연구서다. 첫 번째 시도였던 「통찰의 시대」에 비하면 스케일이 확 줄었다. 전작에서 저자는 유달리 통섭적 창조력이 폭발했던 세기말 빈에서 정신분석, 의학, 예술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했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간 서양미술사에서 간과되었던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의 미묘한 심리적 양상들이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쉴레의 작품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았던 대작이었다. 뇌 과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저자는 그 책을 통해 지각심리학, 뇌 과학, 미술을 아우르는 혁신적이고도 폭넓은 혜안을 보여주었다.

지각심리학과 뇌 과학, 그리고 미술의 통섭이라는 주제의식은 동일하지만, 제목을 언급하기 민망한 이번 신간에서는 그 범위를 확 줄였다. 아마도 「통찰의 시대」에서 이미 대부분의 과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촉발된 새로운 관심사와 발견들로만 범위를 한정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한번은 제목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번 책,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은 시지각에 관한 뇌 과학 이론과 현대미술의 추상화 경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환원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몇 가지 가능성들을 짚는 수준에서 개관하였다.

먼저, 자신의 전공분야라고 할 수 있는 시지각의 생물학적 메커니즘 속에서 환원주의는 방법론적 측면과 실제 지각 측면의 두 양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복잡한 감각계와 신경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시지각 과정을 최대한 단순화된 실험설계나 예시를 통해서 검증하고 거기서 발견한 원리를 보다 복잡한 과정에 적용함으로써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달팽이의 일종인 군소의 시지각 체계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유사하면서도 매우 단순화된 형태를 띠고 있는데, 군소에 대한 자극 실험을 통해서 일종의 선험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상향정보 처리 과정과 학습의 피드백으로서 하향정보 처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실험은 우리의 뇌가 수용한 자극을 바탕으로 학습하여 특정한 인지 및 반응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실제 지각 측면에서 환원주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수많은 대상들 중에서도 우리가 초점을 맞추게 되는 특별한 대상들이 존재하고, 그 대상들은 우리 뇌의 전담 체계를 통해서 일종의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을 포함한 유인원은 얼굴을 인식하는 부위인 얼굴반이 특별히 발달하였는데, 이 얼굴반은 감정과 행동을 좌우하는 시상하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대상의 얼굴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DNA 속에 깊숙이 내재된 ‘접근과 회피’의 기제를 뒷받침해준 훈련과 진화의 산물일 것이며, 생존과 종족번식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복잡하고 애매한 대상에서도 순식간에 누군가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고, 심지어 그 얼굴의 감정까지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시지각적 환원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의 세계 지각이란 현실에 부합되는 환상이다.”


크리스 프리스

미술에서 환원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모더니즘 미술사를 개관한다. 환원주의의 씨앗은 영국에서 터너가 뿌렸다. 이 책에서는 빠졌지만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한 컨스터블의 노력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이들의 화풍에서 볼 수 있는 초기 형태의 환원주의는 ‘마땅히 거기에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리던 것에서 탈피하여 ‘지금 내 눈 앞에 있다고 느끼는 것’만 선별적으로 그리는 태도로의 변화이다. 이 태도는 이내 프랑스의 아방가르드들에게 전이되어 마네에서 세잔으로 이어지는 ‘평면혁명’을 예고하였다. 20세기 미술을 열어젖힌 피카소와 마티스는 각각 형태와 색채의 반란을 일으키며 이제 2차원적 평면 위에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이젤회화의 사명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이후 뉴욕시대에 이르러 이제 알아 볼 수 있는 그 어떠한 형태도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추상의 시대, 환원주의의 끝에 도래하게 된다.

미술에서 환원주의는 결국 대상을 사진 찍듯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심상 속에서 점점 단순한 형태로의 변환, 그리고 나아가 아예 그 어떠한 대상도 참조하지 않는 형태의 창조를 포괄한다. 재현이 아닌 창조로서의 추상미술은 전에 없던 시지각적 체험을 선사하며 미처 개발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감성과 감정을 훈련시킨다. 선험적 구조 속에서 특정한 형태를 상향정보를 통해 지각하고, 하향정보 과정을 통해 기존의 학습 이미지들과 결합하려던 시도는 무산되고 새로운 차원의 판단과 사고영역 속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추상미술은 화가의 의도와 감정을 유추하는 모험이 되고 관람자의 자아 속에 흩뿌려져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심상의 조각들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된다. 얼굴반처럼 우리 뇌에서 기존에 왕성하던 특정한 범주를 선택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지축을 뒤흔들며 폭넓은 파문을 일으킨다.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그 파문이 추상미술이 성공을 거둔 이유이며, 미술사에서 환원주의의 승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지각은 세상을 보여주는 단순한 유리창이 아니라 사실상 뇌의 창조물이다.” 48

가벼운 분량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의 단초들로 가득한 책이다. 미술과 과학의 통섭적 지점에는 늘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아마도 그 둘이 원래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합리주의적 사고의 일반화로 인하여 거스를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두 문화를 중재하기 위한 노과학자의 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경이롭다.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면 대부분 특강을 다니느라 정신없어서 정작 본연의 연구에는 소홀해지니 인류 전체에는 ‘노벨상의 저주’가 아닐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에릭 캔델에게는 그 속설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과학과 예술이 자유롭게 만났던 ‘빈1900’의 살롱문화가 다시금 도래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 이 책의 최대 문제점은 역시나 한국판 제목인데, 처음에 미술 분야 신간 목록을 보다가 이 제목을 보고 ‘아니, 무슨 곰돌이 푸 에세이 같은 책이 여기 껴있나…’ 하면서 눈을 비벼야 했다. 하마터면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칠 뻔했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는 에릭 캔델의 신간이었는데도!

「미술과 뇌과학의 환원주의(Reductionism in Art and Brain Science)」라는 이 정갈하고도 기품 넘치는 제목을 폐기처분하고 말랑한 포장으로 상업주의와 결탁하려한 프시케의숲 측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매력이 돋보인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ristina Barcelona, 2008)」 이후로 가장 충격적이고 지탄할만한 초월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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