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

Roland Barthes, Mythologies (1957)

“언어의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서 그의 언어를 훔치는 것,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 모든 합법적인 살인이 시작된다.”

70p

“신화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

282p

신화에 거하거나, 벗어나시오

책은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장은 바르트(Roland Barthes)가 현대의 신화들을 구체적 실례로 살펴보고 그 내막을 샅샅이 분석한 내용이다. 1950년대 현재, 프랑스의 사회, 문화, 예술, 경제, 법률 등 전반에 걸쳐 보통사람이라면 그저 흘려버리기 쉬운 신화의 단서들이 섬세하게 포착되었다. 이어지는 뒷 장은 신화란 무엇인지 그 개념과 영향,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신화학의 정체성을 밝히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론과 실재”라는 어순에 비춰 본다면, 실재가 먼저 나온 후 이론이 뒷받침하는 형국이다.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의 개념은 언어활동과 메타 언어활동의 차이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언어활동은 언어가 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다. 예컨대 농부들이 밭에 나가기 전에 날씨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주고받는 말은 실질적인 경작 활동에서의 실효적인 노동 행위로 이어진다. 이것이 언어활동이다. 메타 언어활동은 특정한 언어활동에 관하여 그 활동의 경계 밖에서 만들어내는 말이다. 농부들이 날씨에 대하여 주고받은 말을 문학작품으로 옮긴 시인의 활동은 메타 언어활동에 속한다. 시인은 농부의 일차적 언어를 재료로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언어활동은 무엇을 말한 것이고, 메타 언어활동은 무엇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언어활동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메타 언어활동은 의미작용을 만들어낸다.

신화가 그저 메타 언어활동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정의에 그친다면 바르트가 그렇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신화학이라는 학문을 주창하지도 않았으리라. 또한, 신화를 메타 언어활동이라고 정의하고 끝나면 바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신화적 작동방식 중 하나인 ‘동어반복’이 된다. 모든 신화에는 저의가 있다. 그 저의를 밝히는 것이 신화학자의 책무다. 기표가 형식이고, 기의가 개념이라면, 신화는 의미작용이다. 의미가 자명한 무언가라면, 의미작용은 자명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신화는 지칭하면서 통고하고, 이해시키면서 강요한다(275p).”

신화는 단순히 어떤 의미를 덮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신화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282p).” 신화는 파롤을 훔치는 것이다. 신화는 의미를 훔쳐 변형시키고 그것을 제자리로 가져다 둔다. 그래서 대다수는 그 의미에 뒤틀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신화는 역사적인 의도를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으로 둔갑시키고, 우연히 발생한 어느 사건으로 뒤틀려버린 역사의 궤적은 영원과 필연으로 만든다. 인류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보편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반화시키고, 자명한 차이들과 고유한 특징은 지워버린다.

이처럼 강력한 의미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신화이건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신화는 이미 생산된 것에만 관여할 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한다. 생산은 신화와 대비된다. 앞서 말했듯, 신화는 언어활동이 아닌 메타 언어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활동은 오히려 혁명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신화와 양립하지 못한다(320p). 바르트의 이러한 지적이 1957년에 발간되었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그 사건’이 벌어졌다.

바르트는 “자명한 것으로 포장된 진술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오용을 다시금 포착(3p)”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이 목표를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은 학자적 객관성과 작가적 주관성을 통합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현대의 신화」의 두 장은 각각 작가적 주관성과 학자적 객관성을 적절히 대표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트가 주목한 프랑스의 현대적 현상들이 포용하고 있는 범주는 놀라울 정도로 넓고 다채롭다. 그는 프로레슬링 속 극명한 선과 악의 연기가 애매모호한 세상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대중을 단박에 사로잡는다고 지적한다. 아르쿠르 스튜디오의 촬영용 소품들이 기호학적으로 갖는 의미들을 풀어낸다(28p). 로마 시대를 재현하는 헐리우드 영화 속 배우들의 헤어 스타일과 땀도 놓칠 수 없는 소재다(33p).

이러한 분석은 단편적이며 암시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언론에 보도된, 휴가 중인 작가가 독서하는 이미지는 한층 더 정치적이다(38p). 대단한 창조의 세계를 만들어 낼 것 같은 문인들조차 휴가지에서는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일상에서 벗어난 초월적 세계에 작가들이 머무르는 것이 이상적임을 상정한다. 현실의 지리멸렬한 정치적 의미들을 다투기보다는, 초탈한 세계관에 작가들이 계속 머물며 승인된 범주 안에서만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묘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멍청해서 마르크스주의적 작품을 제대로 비평할 수 없다고 자인하는 비평가들에게 날선 비판을 돌린다(46p). 이러한 비평가들은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 같은 현실 정치에서 위험해 보이는 사상에 대하여 자신의 무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을 돌리는 데, 이러한 태도는 사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며, 만약 능력의 문제가 맞다면 비평가의 자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밖에도 화성인, 주방용 세제, 화장품, 장난감, 사법체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자건거 경주, 이국취향, 플라스틱 등 종잡을 수 없이 일상에 산재한 소재들이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의 신화화에 맞서는 바르트의 작업에 포섭된다.

그렇다면 신화는 우파만을 위해 존재하는가? 한편으로는 맞고, 또 한편으로는 틀리다. 만약 이 질문을 이렇게 고친다면 맞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우파가 생산한 신화만이 효과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 그렇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통계적으로 신화는 우파의 신화이다. 우파에서 신화는 본질적이다. 매우 알차고, 빛나고, 팽창적이고, 수다스러운 그 신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324p).” 우리가 오늘날 자발적으로, 부지부식간에 향유하는 모든 신화는 우파의 신화다. 좌파에도 물론 신화가 있었고, 신화화의 시도가 계속 이어져 왔다. 쿠파의 뒷골목에서 발견한 체 게바라의 이미지, 만수대의 김일성 부자 동상,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시위 현장에서 산화한 모 열사의 걸개그림…. 하지만 좌파의 신화는 일회적 이벤트에 그친다. 그것은 폭넓은 대중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빈곤하다. 거기에 철학과 미학이 부재하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신화에 눌어붙은 정치 체제가 시장에서 고객들의 수요에 의해 선택되는 하나의 상품이라고 단순화해본다면, 그것의 수요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미 역사가 증명해 버린 것일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 내게 아주 성공한 좌파의 신화 하나를 들고 와 예를 들며, “이것 보라, 좌파의 신화에도 성공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첫째, 그 신화를 만든 좌파는 이미 그들의 세상에서 사실상의 우파가 되었습니다. 둘째, 그 신화가 좌파에 의해 탄생한 것일 수는 있으나, 현재는 우파에 의해 전유되어 그들의 영속적 통치를 위해 복무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답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좌파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결국 우리는 우파의 신화 속에서 살고 있음이 자명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뗄 즈음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곧바로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의 난잡한 성생활을 배운다. 자기 용돈을 모아 극장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마 마블 히어로에 열광할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승전보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내 우리의 이야기로 동화된다. 이제 제국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다. “압제자는 메타 언어활동의 독점권을 갖는다(324p).”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신화의 목적은 바로 세계를 고정시키는 것(333p)”이다.

바르트는 신화학자의 딜레마를 분명히 직시했다. 신화학자는 신화를 그저 파괴해서 보여줄 뿐 유토피아를 제시하거나 스스로 세우지 못한다. 그러한 활동은 그의 능력 밖에 있다. 신화학자도 신화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입자일 뿐이다. 그저 그 구조의 메카니즘 하나를 볼 수 있는 섬세한 눈과 풀어낼 수 있는 논리를 갖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둘의 이상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종합이 현실 세계에서 구현된 결과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화해의 지점을 찾는 끝없는 여정이 놓여 있을 뿐이다.

바르트는 분명 개념적인 차원에서 혁명을 긍정했지만, 이 책을 쓴 시점,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혁명의 기회에서 10년 앞선 현시점에 진짜 혁명의 가능성을 예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에게 우파의 신화를 해독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지침을 줬다. 즉, 우파가 신화를 창출하고 재생산하는 데 활용하는 일곱 가지 유형의 전략을 우리에게 폭로해 줬다. 이제 대기 중에 유동하는 기호의 파도 속에서 이 전략들을 식별하고 올바로 독해할 책임은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졌다. 여기에는 바르트가 몸소 보여줬듯, 작가적 주관성과 학자적 객관성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독해하고 경계할지, 아니면 그저 흘려버릴지는 물론 각자 신념에 달린 문제다. 주어진 신화 속의 삶과 그래도 나름대로 선택하려고 노력한 삶 사이의 차이는 충분한 시간이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밝혀질 것이다.


우파의 일곱 가지 신화화 전략

  • 첫째는 예방접종이다. 체제의 부수적인 악을 미리 고백함으로써 일시적인 안심을 가져오고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숨겨 전복의 위험을 줄이는 전략이다. “고백된 약간의 악은 감춰진 많은 악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준다(58p).”
  • 둘째는 역사의 제거다. 신화의 대상이 되는 주체의 고유한 맥락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단편화시켜 개념적으로 소유하기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들은 순수한 동태복수이며 오직 그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양식이란 이상적 세계를 반격이라는 직접적 메커니즘들로 축소시키는 정신의 이러한 선택적 반응이다(120p).”
  • 셋째는 동일화다. 특정한 대상을 프티부르주아와 동일화시켜 공통적 본질이 있음을 상정하고,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든다.
  • 넷째는 동어반복이다. ‘A는 A이다.’와 같이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적 정의는 그 대상 자체 외에 다른 대안적 가능성을 손쉽게 묵살할 수 있게 한다.
  • 다섯째는 양비론이다. 두 개의 대립적 가치나 대상을 모두 거부하면 더이상 선택지는 없고 계속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 여섯째는 질의 양화이다. 질의 문제를 양의 문제로 치환시켜 중요한 질문은 파묻어 버리고 오직 주어진 양으로 인해 헛배부름을 느끼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 일곱째는 확실한 사실이다. 누구나 알고 있으며, 반론이 불가능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을 세워 놓고, 그것을 격언화하여 부동의 행동규범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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