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Claude Lévi-Strauss and Didier Eribon, Conversations with Claude Levi-Strauss

20세기 말 지성계를 휩쓸었던 구조주의의 선각자이자, 프랑스의 참여 지식인 계보에서 거의 끝자락을 장식했던 인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회고록이다. 대담은 푸코(Michel Foucault) 전기로 잘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이 진행했다.

당대 눈부시게 발전했던 언어학적 방법론을 차용해 원시 부족의 친족 및 혈연 체계를 설명하고, 특히 여러 인류 문명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혼인 규칙과 근친상간 금기의 원칙을 집단 간의 사회적 거래 관점에서 해석했던 그의 관점은 후배 구조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질적인 민족들의 혈연 체계를 설명하는 공통의 근본 구조가 있다는 발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관계를 맺는 등 총체적 방식에도 언어학적 규칙과도 같은 구조가 있다는 발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인식소를 파헤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존재의 무게와 고뇌를 짊어지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는 실존적 자아의 이상은 흐릿해졌고, 시공간적 구조에 얽매인 자아상이 부상하였다.

이렇듯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함께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의 원류에 가져다 놓는 계보학은 오늘날 상식처럼 통용된다. 하지만 정작 80세에 출간된 이 회고록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과 구조주의의 관계를 애써 부인한다. 본인을 구조주의자의 조상으로 보지도 말고, 구조주의자인 후배들과 자신을 긴밀하게 연결하려 들지도 말라는 투다. 그들이 자신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자신은 그저 인류학자일 뿐이라는 식이다. 사실 구조주의의 절정기를 구가했던 후배들도 시간이 흘러 당시를 회고하며 구조주의와 거리를 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아니겠는가. 사상적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그 누구라도 ‘무슨주의’라는 식으로 둘러쳐진 울타리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을 터다. 심지어 ‘무슨주의’라는 틀 안에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도 각자 저마다의 차이를 주장하니 대중의 명명 속에 폭력적으로 동질화되는 경향에는 누구라도 저항하고 싶지 않겠는가. 현실은 이처럼 복잡해지기만 하는데, 언어는 필연적으로 단순해지기만 하니, 자기 손으로 만든 세상을 거부하려는 사상가들은 앞으로도 줄기차게 목격될 것이다(아니, 자기 손으로 그 어떤 세상이라도 만들어 보려 야심을 품는 사상가라는 존재 자체를 앞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으려나? 일단 그 대목은 논외로 하자.).

레비스트로스가 후배 구조주의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가장 큰 차이로 본 대목은 자신이 서구 문화가 아닌 원시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브라질 소수민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학문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여정 가운데서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발생한 우발적 사건에 가깝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그는 거기서 자기 흥미와 재능을 발견했다. 원시 부족 사회에서 발견한 금기와 신화가 인류 사고체계의 원형을 암시하는 무언가라고 믿으며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후배 구조주의자들은 그러한 접근 방식을 서구 문명사에 적용했다. 그 토대는 연구자 스스로가 이미 발을 딛고 있는 세계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자기가 원시를 연구하기 위해 접근했던 방식이 다시 서구로 전유되어 서구가 특권적 세계로 다시금 옹립되는 상황이 마뜩잖았던 것 같다. 그래서 구조주의자들과 자기를 잇는 계보학적 선을 지우고 싶었겠지만, 스스로 인류 공통의 무언가를 주장한 시점에 이미 구조주의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모든 인류 공동체에 적용될만한 어떤 방법론이 등장한다면, 누구라도 자기가 속한 친숙한 공동체에 그 방법론을 우선 적용해 보지 않겠는가? 보편성을 취득하려는 야심과 적용 대상을 선별하려는 조심스러움은 공존하기 어렵다. 도구를 시장에 내다 판 순간, 도구를 사용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구매자에게 내맡겨진다.

대중은 레비스트로스를 프랑스 참여 지식인의 마지막 계보쯤으로 여기지만, 본인은 참여 지식인의 월계관을 버거워했다. 사람들이 지식인을 칭송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과 집요함을 갖기 때문인데, 그 능력을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낮은 주제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관찰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말을 보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갔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고,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여 분석했다. 그럼에도 동화되지는 않았다. 민족학자라면 어떤 민족에 융화되지 않으면서 다소 거리를 둔 채 객관적이고 엄정한 시각으로 분석해야 함을 늘 상기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되, 외부인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이론화를 추구해 왔기에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진솔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전통 철학이 많은 접근 방식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분쟁은 사라집니다(250p).” 암요,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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