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ire Dederer, Monsters: A Fan’s Dilemma
삶과 예술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내가 읽고 싶었던 유형의 책이긴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유형의 책이다. 이런 매력적인 주제와 논법으로,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이미 완결된 작품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억울함마저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아주 명석하고 재치 넘치는 누군가가 세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에 자기 삶의 진솔함까지 버무려 절묘한 비율로 반죽해 정성스럽게 빚어 놓아야만 이런 책이 나온다.
이런 글을 철학자 김영민은 ‘잡된 글쓰기’라고 명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술평론가 김성호는 ‘자발적 비평’이라고 불렀다. 부르는 법은 달라도 요지는 일맥상통한다. 진정 우리가 읽고 싶어 하는 글이란 누군가의 청탁에 따라 억지로 쓴 글이 아니다. 학계와 같이 폐쇄된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되는 닫힌 형식과 문법에 목을 매는 글도 아니다. 저자의 내면에서, 삶의 경험에서, 체화된 신체 감각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사고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유동하며 응축된 글이다. 오직 거기에만 생생한 진리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무슨무슨 미술관’ 혹은 ‘한 권으로 끝내는 어쩌구저쩌구’라는 천편일률적인 제목으로 무장한 급조 대중서들만 넘실거리는 공공 도서관 예술 코너 귀퉁이에서 이따금 이런 책을 만나기도 하니, 삶은 그럭저럭 살아갈 만하다.
# 그 질문
아동 성폭행범이자 천재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로부터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이 책은 비평의 일반적인 논법에서 벗어나 큰 틀에서 자전적 에세이의 형식을 띨 것임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저자 클레어 데더러(Claire Dederer)는 한 사람의 직업인인 평론가로서, 그보다 앞서 열렬한 문화예술 애호가로서 폴란스키의 작품을 사랑했지만, 천하의 쌍놈스키에 가까운 그의 사적 행적들을 더 깊이 알게 될수록 인간적 혐오감을 감출 길이 없게 되었다. 감독의 작품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힘과 사랑과 용기를 주었고, 외로웠던 시간을 예술적 영감으로 아름답게 채워 주었지만, 감독의 행적은 실존적 한 사람(밝혀진 바로는 분명 한 명 이상)의 파멸을 불러왔고, 그 생존자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저자는 그때부터 양가감정의 딜레마에 빠져 고통받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부상한다. 괴물이 창작한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조금이라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내면에서 맞닥뜨리지 않은 적이 없으리라 단언한다. 만약 당신이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마도 인류가 지금까지 창작해 낸 모든 문화예술 컨텐츠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껴보지 못한 불감증일 것이다. 아니면, 작품을 창작한 주체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내주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작품만을 즐기는 희귀종일 것이다. 그것마저 아니면, 당신은 살아가면서 그 어떤 딜레마에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에 대해 전혀 사유하지 않으려 순식간에 반사적으로 회피 기동하는 단세포 동물임이 틀림없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 어떤 (가상적) 유형의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이 공개적 장소에 남겨 두는 것이 전혀 껄끄럽지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말로 그런 단세포 동물이라면 이 글을 이 지점까지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지는, 이 시대 거의 모든 교양인이 괴물이 창조해 낸 작품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에 대한 자기만의 그럴싸한 관점을 고안하기 위해 각자 능력과 자원의 범위 안에서 저마다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문제를 자기 삶과 결부하면서까지 깊숙이 성찰해 보고자 했던 저자의 시도는 용감하고도 시의적절하다.
# 나의 괴물들
저자가 자전적으로 접근했으니, 상호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나도 내 이야기로 시작해 본다. 내가 어떤 뮤지션에게 꽂혀서 한번 제대로 파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첫 사례가 비틀즈(The Beatles)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몇몇 앨범을 사 듣기 시작했고, 대학교 시절에는 기왕 듣는 것 제대로 공부해 보겠답시고 큰마음 먹고 2만 원짜리 양장본 전기까지 사 읽었다(아마 지금 출판되었으면 5만 원 정도이지 않을까).
헌터 데이비스(Hunter Davies)가 쓴 그 전기를 통해 그루피 문화를 처음 알게 되었다. 6~70년대 락앤롤의 전성기에 비틀즈 같은 인기 밴드들을 따라다니는 소녀들이 있었고, 투어를 바친 밤이 되면 매니저가 나서서 그 소녀 중 몇몇을 선별해 아티스트의 숙소에 들여보내는 일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던 나의 당시 성인지 수준은 스무 살 무렵의 여느 이성애자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행위의 복잡한 인과관계와 도덕성을 따져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냥 서로 간의 수요-공급과 이해가 일치되어 벌어진, 아득한 야만의 시절을 상징하는 에피소드쯤으로만 여겼다. 시간이 흘러 팬심에서 돌아선 몇몇 소녀들이 폭로전을 벌이거나, 친자 확인 소송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그냥 인기스타의 유명세에 따라 오는 부작용쯤으로 치부했다. 바쁜 일상에 매여 있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자신에게 절대 벌어지지 않으리라 철석같이 믿는 어떤 가학적 사태에 대해 숙고할 필요성을 느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지 않겠는가(라고 비겁하게 자평하며 일반화해 본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사례는 크리스 브라운(Chris Brown)과 알 켈리(R. Kelly)다. 크리스 브라운은 애인을 폭행했고, 알 켈리는 그보다 훨씬 더 악질적인 아동 성폭행범이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긴 했으나, 크리스 브라운은 최근까지도 20곡이 훌쩍 넘는 곡이 꽉꽉 들어찬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다작왕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이 정도 생산성은 그 어떤 후배 R&B/힙합 아티스트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알 켈리는 유죄가 확정되어 앞으로 새로운 창작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나, 과거 앨범마다 한 곡씩 끼워 넣었던 가스펠 풍 편곡은 시간을 초월하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들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우지는 않았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하고, 감수성을 키우고, 외로움을 견딘 숱한 시간은 내 인생의 궤적에 선명한 자취로 남아 있다. 그들은 대체할 아티스트가 없듯, 그 시간을 대체할 가상의 멀티버스적 세계관 같은 것이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석연치 않은 죄책감 속에서도 그들의 음악은 플레이리스트 한구석에 끼워져 숨죽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곤 한다. 물론 그들을 대체할 수 없다는 단언의 배경에는 나의 성인지 감수성 및 공감 능력 부족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능력 부족은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사건을 접하고 곧바로 크리스 브라운이나 알 켈리를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버린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은(못한 것이 아니다) 나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 그 비난에는 일말의 오류가 없다. 그들의 진심과 실천에서 우러나온 비난은 그 자체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합리적이라고 해서 논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괴물 예술가에 대한 각자의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 하나, 어디까지나 논리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 판단임을 인정해야 한다. 예술 작품은 백과사전과 달라서 본질적으로 감정을 건드리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작품의 존재 이유다. 건드림을 당한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히고 사랑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감정은 신체 기능을 조절하고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 브라운과 알 켈리를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야 한다는 의견은 보편타당한 윤리적 평가에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여전히 듣는 사람처럼 감정을 따른 의견이다.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43p).”
문제는 감정이란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헌법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감정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품고 싶다고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난 배경, 살아온 조건, 찰나의 경험, 신체적 특성 등 한 인격체를 구성하는 여러 과정과 재료의 총체로 인해 그저 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혹은 증오하고 싶다고 결정할 수 없다. 만약 그게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랑 노래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괴롭거나, 반대로 날아갈 듯 행복한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부터 인류 보편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따라 크리스 브라운과 알 켈리의 생존자들과 연대하기로 마음먹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모든 관련 자료를 철저히 숙지하고, 관련 단체에 가입해 기부금을 내며 열성 회원으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피해자 연대성의 고지에서 닿을 수 있는 지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내가 아무리 의도적인 노력을 거듭하더라도 그 사건을 접하자마자 자발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괴물들을 플레이리스트에서 영구 삭제한 사람들이 닿은 연대성의 고지까지는 절대 도달할 수가 없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 연대라는 한계에 부딪혀 끝없이 산 중턱을 맴돈다. 완전 연대의 고지에 올라선 시민들이 그로 인해 나를 아무리 손가락질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경험과 조건은 완전 연대의 고지에 절대 닿을 수 없도록 내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데, 그것은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태어났다.
# 분리론
괴물의 창작물에 관한 딜레마에 빠진 누군가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수야 있겠지만, 그러려면 대단히 어색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작품 자체가 애초에 작가의 삶과 분리되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작가는 세상과 호흡하며 숙성한 관점을 작품에 투사한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나고, 그가 살았던 세상에 발을 들인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나는 과정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거 누가 만든 거야?’라고 묻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결국 작품은 핑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기 위해 작품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 작품은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 내가 앞서 작품을 창작한 주체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내주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작품만을 즐기는 사람을 희귀종이라고 규정했었는데, 정말 그런 희귀종이 존재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아름다운 작품을 접하면 우리는 응당 그 창작자를 궁금해하지 않나? 도대체 작가는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먹고 자랐길래 이 같은 명작을 잉태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나? 조금이라도 궁금한 마음이 들면, 그 순간 작가와 작품의 분리론은 힘을 잃게 된다. 사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신비평은 유럽 작가에 대한 자료를 구하지 못한 미국 비평가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논리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56p).
# 기술
기술은 딜레마를 부추기는 유력한 변수다. 머나먼 옛날, 우리는 작가의 인성이나 삶에 대해 이렇게까지 많이 알지 못했다. 작품에 관한 정보는 희박했고, 시뮬라크르는 신성했다. 그야말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그 이전의 시대였다. 아름다운 무언가에는 신성불가침의 아우라가 감싸고 있었다. 예술가의 괴물성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좀처럼 보도되지 않았다. 그들이 유용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이상 추잡한 정보를 통제해 줄 후원자나 기생 세력이 얼마든지 있었다.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된 오늘날의 초연결 사회는 정보의 민주화와 함께 모든 아우라를 파괴했다. 순수한 작품의 맛만을 온전히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허물이 있게 마련인데, 오늘날 정보혁명은 동경하는 예술가들에 관한 온갖 알고 싶지 않았던 허물에 너무나도 수월한 접근 경로를 제공한다. 요즘 유튜브나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왜 ‘나락’이라는 말이 유행하겠는가. 의식하지도 못한 찰나의 실수나 언행이 몇 번의 공유만으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하고 영구적으로 박제되어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평판을 한순간에 시궁창에 처박는 사례를 하루가 멀다고 관찰한다. “우리는 개인사가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고,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하나의 얼룩은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온 이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취소당했거나 취소당할 예정이다(73p).”
# 천재들
괴물성의 화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주제가 천재라는 논쟁적 개념이다. 천재는 시대를 초월해 모두의 추앙을 받는 창작자다. 저자가 예로 든 인물은 피카소(Pablo Picasso)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다. 자기가 속한 장르의 대명사가 되어 예술사를 바꾼 인물이다. 동시에 숱한 여자를 이용한 후 버린 마초였다.
우리는 은연중에 천재라면 어느 정도 괴물성을 띠기 마련이라는 도식을 인정한다. 이 세상에 전혀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가공할 영감과 추진력이 필요한데, 매일매일 성실하게 집-회사-교회만을 오가는 필부필부가 어느 날 불현듯 번개를 맞아 천재로 둔갑해 위대한 무언가를 쏟아 낼 것이라는 환상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재라면 가공할 신적(또는 악마적) 영감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비이성적 디오니소스의 힘에 몸을 맡겨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 사회의 고리타분한 규율이나 사회 보편의 행동양식 따위는 개나 줘야 할 것 같고, 또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천재가 아닌)에게 상처를 주거나 의도치 않은 위해를 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이 바로 천재에게 주어지는 면죄부다. 천재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천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거기서 나온 천재성을 바탕으로 위대한 창작에 매진하고, 그로 인해 인류는 문화예술의 뛰어난 성취를 맛보며 정서의 수준을 교양한다.
자유로운 예술 창작에 어느 정도의 방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방종이 누군가에게 끼치는 실존적 피해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는 천재가 만들어낸 산물을 죄의식 없이 즐기지만, 그 천재의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내 가족이나 이웃, 혹은 나 자신에게 닥친다면 당연히 그 작품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혹자는 착한 예술가들이 착한 작품(내용 및 형식 면에서 그 누구의 감정도 거스르지 않는 작품)들만 만들어서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착한 예술의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를 꿈꾸지만, 그런 세상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구현된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143p). 그런 착한 예술가와 작품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쁜 천재들이 나쁜 놈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필요에 의해 그들을 소환하거나 만들어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144p). 그런 점에서 천재라는 명칭은 누군가의 재능을 판가름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선이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예술 소비자들이 괴물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마음 놓고 소비하려고 갖다 붙인 자유이용권에 가깝다. 괴물을 천재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 괴물의 눈부신 산물을 죄의식 없이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그 괴물의 작품을 꼭 즐겨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그만한 천재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딜레마를 뭉뚱그리며 소비의 윤리적 책임을 비껴갈 수 있게 된다.
# 이례적인 괴물
괴물들을 용인하게 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은 우리 자신 또한 어느 정도는 괴물임을 인정하는 마음이다. 인터넷 여론에 휩쓸려 어떤 유명인의 사소한 실수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쉽지만, 상식 있는 교양인이라면 그런 군중심리에 쉽게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상황이 닥치면 자신도 무심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끔찍한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는가, 실천한다면 어느 정도나 대놓고 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형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성적 비위는 유난히 큰 죄악으로 치부되었는데, 이러한 강력한 사법 처분의 기저에는 내가 하고 싶었으나 금기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한 것을 당당히 실천으로 옮긴 자에 대한 질투심이 깔려 있다. 물론 이때 질투심이라는 감정은 절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괴물성의 딜레마 안에서 가지를 쳐나가는 여러 세부 논제가 있다고 할 때,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롤리타」만큼 여러 논제에 발을 걸친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야말로 논쟁적 예술의 표상이다. 일단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욕망은 극단적으로 더러운 동시에 생각보다 만연하다. 만연하지 않다면 오늘날 여러 국가의 사법제도가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이렇게까지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욕망을 아직도 적절히 막지 못한 국가들의 사례(우리는 그 사례들 앞에 일관되게 야만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도 여전히 끊임없이 들려온다. 이 욕망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자전적 에세이를 풀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경력과 인생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위험하다. 확실한 것은, ‘나’를 주체로 상정하지 않는 일반론 관점에서, 이 욕망이 우리 일상을 둘러싼 평범한 이웃들의 마음속에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롤리타」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더러운 이 욕망이 배태한 괴물성을 다룬 작품인데, 저자 본인이 괴물인지 아닌지는 그저 독자의 심증에 내맡겨지면서 딜레마가 증폭된다. 저자가 소설 속 화자 험버트 험버트를 내세워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떠벌였다는 것은 거의 90% 이상의 심증으로 우리 마음속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낸다. 저자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장황하고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비열할 정도로 자기방어적일 수가 없다. 그런데 실제 작가의 삶에 관한 그 어떤 자료에서도 그가 이 추악한 욕망을 실천했다는 증거가 없다. 시간이 흘러 그런 증거가 새롭게 발굴될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지금으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보코프는 괴물이 아니다. 그저 소설 속 가상의 인물 험버트가 괴물일 뿐이다. 험버트의 사고 흐름이 너무나 상세하고 장황하고 (부정적 의미에서) 인간적이라서 저자 자신의 목소리임이 틀림없다는 심증은 있지만, 저자가 스스로 그 욕망을 현실 세계 속에서 실천한 적이 없고, 실존적 피해자도 없으므로 이 작품은 표현의 자유라는 고귀한 성좌 위에 우뚝 서서 예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기념비가 된다. 오히려 나보코프는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이 작품을 통해 순결하게 정화한 것일지 모른다. 이것은 예술의 순기능이다. 그것을 읽은 우리 눈과 뇌와 마음이 썩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책을 집어 들고 끝까지 읽어 내려간 것은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그 누구도 독서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불편한 상식 하나를 굳이 덧붙이자면, 실천하지 않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욕망이 무엇이건 간에 동서고금의 어떤 법률로도 정죄할 수 없는, 완벽한 무죄다.
이처럼 데더러는 괴물성의 딜레마라는 논제에서 가장 이례적인 사례로 「롤리타」를 끌어들인다. 소설가가 괴물이라는 증거가 없는데, 소설가가 창조한 작품 속 괴물은 너무나도 괴물 그 자체이고, 몰입적이고, 사실적이기 때문이다(191p). 따라서 괴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 가운데, 이 작품에는 별도의 장을 내줘야 한다. 참, 세상 쉬운 일 하나 없다.
# 여성 괴물들
여기까지 저자의 논의를 성실하게 따라오더라도 정작 저자가 괴물성의 딜레마를 어떻게 다루기로 마음먹었는지에 관한 최종 결론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고민의 깊이와 괴로움만이 전해질 뿐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작품을 그 창작자가 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계속 갈팡질팡한다. 그러다 갑자기 논의는 여성 괴물로 선회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당황스럽다. 여성 괴물이 등장하리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몇이 등장하기는 한다.
우선,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가 등장하는데, 당연히 그는 괴물이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딱히 가해한 적이 없다. 그는 독창적 퍼포먼스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독보적 영역에 이름을 새겼다. 그 경력의 정점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성 예술가가 석연치 않게 떠난 ‘밀실’에 유일한 증인인 남편 칼 안드레(Carl Andre)가 있었지만, 뚜렷한 심증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그는 무죄였다. 남편은 계속 경력을 쌓았고, 전설이 되었지만, 아내의 작품활동은 37세에 영원히 멈추어 버렸다. 이후 비평계의 윤색을 거쳐 아내의 죽음은 전설적 예술가가 된 남편의 경력에 영향을 미친 개인적 사건이나 우발적 비극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201p). 멘디에타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면 남길 수 있었던 가상적 유산에 대한 고찰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고, 살아남은 자만이 역사 집필의 권력을 온전히 누리게 되었다.
누가 괴물일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딛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을 재료로 삼아 천수를 누리며 전설이 된 예술가일까? 아니면, 커리어 내내 몸을 던져 젠더, 정치, 사회적 담론을 제기하다가 실제로 몸을 던지거나 던져져 짧은 생을 마감한 예술가일까? 저자가 멘디에타를 소환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제도가 누군가를 잊었더라도 남겨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고 신파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기억해야 마땅한 누군가를 충분히 기려야 한다.
한편, 이 책의 전체 흐름 측면에서 멘디에타가 소환된 이유는 이제 우리가 여성 괴물들에게도 주목해야 할 시간이라는 화두를 꺼내기 위해서다. 그렇다. 여성 괴물 예술가도 어딘가에 있기는 할 것이다. 다만, 멘디에타의 생애가 예견하듯, 그 괴물성의 양상은 남성 괴물 예술가와는 분명 다르다.
저자가 소개하는 여성 괴물들은 천재성을 방패 삼아 일방적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그런 전형성에서 다소 빗겨나 있다. 그들은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곤 하는, 남편과 가정을 보살피는 성 역할을 거부한 이들이다. 작품을 위해 DNA에 각인된 모성애를 거스른 이들이다. 그들은 작품을 위해 남편을, 가족을,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버렸다. 세 아이 중 하나만 데리고 대륙을 건너 성공을 거둔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철부지 시절 낳은 딸을 입양 보낸 후 그 사실을 철저히 감춘 채 일약 스타가 된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소개된다. 그들은 여성 예술가로서 보기 드문 이정표를 세웠으나, 그 이면에는 모성적 본능을 거부한 냉혹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친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의 삶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 사례는 괴물성의 일면이기는 하다. 하지만 앞서 소개된 남성 괴물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천재의 면죄부를 뒤집어쓴 채 누군가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창조력을 뿜어대지는 않았다. 그저 사회적으로 부과된 책임을 저버렸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물론 지탄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 여성 괴물들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날카로웠던 비난의 기세는 다소 누그러졌다. 그 이유는 저자 스스로 숨김없이 드러내듯 여성 괴물들과의 동질감과 속죄의 의식 때문이다.
(좋은, 최소한 본인의 마음에 드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완벽한 부모의 역할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문을 닫아건 채 읽고 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적 고독과 사색이 필요하다. 저술 시간을 가지려면 자식들이 어느 정도 방치되어야 하고, 그들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거기서 오는 죄책감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겠으나, 평균적으로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곤 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할 것이다. 동서양이 다르고,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만, 평균적으로는 그렇다. 어쩔 수가 없다. 남성이 임신하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탓에 뱃속에 태아를 넣어 둔 채로 그 성장을 몸소 체감하며 교감하는 신비로운(동시에 매우 불편한) 경험은 오직 여성만이 누릴 수 있다. 출산 이후 양육에 대한 책임 의식을 여성이 더 많이 느끼는 현상도 생물학적 기본 세팅에 가깝다. 여성이 창작에 매진하려면, 아이를 갖지 않거나, 모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보육자를 배치해야만 한다. 일단 정서적인 면이나 진정성 차원에서 완벽한 대체 보육자란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는 자기 아이들을 사랑한다. 자기 인생의 최대 성취라 여긴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화예술을 사랑한다. 인생의 무료와 외로움을 버티도록 지탱해 준 책을 사랑하고, 글을 써서 자기 목소리를 전하는 직업을 사랑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은 현실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 사랑은 그 마음의 크기만큼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러니 좋은 책을 쓰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할 각오를 해야 한다. “책이라는 것은 작은 이기심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204p).” 그런 차원에서 약간의 과장법을 동원한다면, 모든 창작자는 괴물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야만을 깔고 있어야 성취에 도달할 수 있다.
책을 쓰기 위해 부모로서의 온전한 역할 수행에 약간의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저자는 도리스 레싱과 조니 미첼을 차마 순수악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위험한 발상이지만, 자녀를 버린 엄마-예술가들의 회한과 죄책감은 더 큰 성취를 위한 동력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정이 이어진다.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야만적인 욕구가 예술을 만드는 욕구와도 같다(254p).” 그들은 아이를 버렸기에 더 악바리로 창작에 매진했고, 보란 듯이 더 성공해서 야만을 정당화해야 했다. 아이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엄마-예술가가 분명 어딘가 있을 테지만, 그 양립이 진짜 100점 만점짜리 양립인지는 그 관계의 내밀한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함부로 입을 놀릴 주제가 아니며, 그 양립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한’ 엄마-예술가들의 작품을 싸잡아 폐기하고 나면 아마 우리 손에 남는 작품은 한 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성 괴물 중 온건한 편에 속하는 아이를 버린 예술가들을 거쳐, 이제 양극단에 선 두 명의 여성 괴물이 등장할 차례다. 한 명은 성찰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페미니스트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다. 다른 한 명은 파괴적이고, 외롭고, 무모할 정도의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페미니스트 선동가 밸러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다. 플라스는 유년기부터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통받았고, 바람둥이 시인과 결혼해 끔찍한 생활고와 우울증을 겪었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생을 마감한 방식이 충격적이긴 하나, 아이들의 방으로는 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꼼꼼히 마감처리를 해 두었던 것을 보더라도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진짜 괴물은 절대 아니다. 반면, 악의 근원인 남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주제의 SCUM(Society for Cutting Up Man) 선언문을 자비 출판한 솔라나스는 딱히 큰 죄도 없고 남성성의 전형에서도 다소 빗겨 난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저격한 일화를 볼 때 괴물임에는 분명하나, 이 책의 주제인 예술가 카테고리에서는 다소 겉도는 인물이다. 저자는 아이를 버린 엄마들에 이 두 극단적 사례를 덧붙이며 예술계에서 여성 괴물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혹여 찾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남성 괴물들과 다른 원리로 구성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남성 예술가들은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그 위대함에 도달하기 위해 누군가를 착취하고, 억압하고, 통제한다. 여성 예술가들은 제풀에 지쳐 스스로 삶을 중단하거나, 광기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해코지하더라도 위대함이라는 성좌를 통해 면죄부를 얻지 못한 채 자멸한다.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275p).”
# 결론: (감히) 책임지려 하지마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대략 눈치를 챘을 것이다. 사실 중반부까지도 조마조마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특정 진영이 쏘아댈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괴물을 용서하면 피해자로부터, 괴물을 거부하면 예술 지상주의자와 유미주의자로부터 종교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경력을 건 저술이나 마찬가지다. 저자는 과연 경력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결론에 앞서 대전제는 이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괴물이 아닌 인간이란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괴물성의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 “유명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는 일은 결국 얼룩이 없는 긍정적인 유명인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한다(296p).” 그런 유명인은 없다. 다만 아직 얼룩이 드러나지 않은 유명인의 껍데기가 있을 뿐이다. “유명인이란 도덕성의 주체가 아니고 재현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다(296p).”
위 대전제를 인정했다면, 이제는 문화예술 소비자로서 책임이라는 전장을 뒤집어야 한다. 이 전장은 우리가 선택한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 전장에 그냥 맨몸으로 던져졌다. 그런 가혹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광범위한 소비사회의 구성원인 자기 존재감을 분명하게 인식하며 올바른 소비를 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 책임감을 느낀다. 과연 그럴까? 괴물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내가 소비하지 않으면 그 예술가는 언젠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먼지가 되어 광야에 흩뿌려질 것이고, 그로서 시대가 부과한 내 역할은 다한 것일까? 우리는 이런 사고의 메커니즘을 따라 책임 있는 소비라는 죄책감을 내면화하며 라마단에 버금가는 힘겨운 금욕 투쟁을 이어왔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바라던 바다. 우리가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캠페인에 목을 매며 금욕하거나, 금욕하지 않는 이들을 맹비난하거나, 금주령 시대의 마피아마냥 몰래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금욕에서 일탈하는 쾌감을 맛본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지식-금융-산업-권력-관료제 네트워크’ 복합체로 구성된 자본주의 시스템이 모든 책임을 개인 소비자에게 전가하며 의도했던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 전장은 우리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 일단 이 전장에서 벗어나자.
정답이란 없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감정을 건드렸다는 것은 실존적 한 인물의 인생 한 페이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남겼다는 말이다. 모든 기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 기록에 따라 좌우된 감정은 그 자체로 정답이다. 꽃이든 갈대든 어떤 방향으로 흔들려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
확고부동한 조건 속에 태어난 우리가 온전히 개인의 선택으로 도덕적인 세상을 만들 방도란 없다. 과도한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한 국가에는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한 공통의 약속으로서 헌법이나 기타 법률 체계가 있지만, 예술 감상의 영역에서는 우리가 모두 따라야 할 윤리 준칙 같은 것이 없다. 어떤 괴물의 작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고, 어떤 괴물의 작품은 평생 거부할 수도 있다. 그 모든 선택은 수용자의 삶의 경험이나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며, 개인의 의지나 사회적 도덕률에 따라 그 선택을 거스를 수 없다. 공연한 죄의식만 부추기는 사회적 합의 같은 것이 공기 중에 두둥실 떠다니다가 우리 숨통을 조여 온다면, 우리는 그보다 상위의 보편타당한 논리적 기반인 행복추구권을 앞세워 그 합의를 당장 무효화할 수 있다. “당신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없다(297p).” 자신에게 그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과도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이 결론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겠지만, 반대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존중 받을만한 감정이고 선택이다. 저자의 주장이 옳다는 근거도 없지만, 반론이 옳다는 근거도 없다. 아니, 양측 모두를 뒷받침할 만한 풍성한 근거가 어딘가에서 분명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찾아올 시간과 열정과 논리력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단 나는 반론을 제기할 역량도 없거니와, 저자의 주장이 평소 내 마음속에 은연중에 깔려 있던 의식과도 맞닿는 측면이 있어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당신이 반론을 제기하기로 했다면, 적절한 재료를 모아, 적절한 논리로 잘 풀어내면 될 일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경험과 주관에서 비롯된 특정 작품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 진실하며,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사랑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진실을 무효화할 방도는 없다. 다만 진실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라서 한눈에 쉽사리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괴물의 예술에 관한 문제는 끔찍한 사람(실상은 대부분의 사람)을 사랑하는, 혹은 사랑해야만 하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결점투성이인 사람을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거나, 앞으로 계속 사랑할 예정이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결점까지도 온전히 사랑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평생에 걸쳐 인정투쟁을 거듭할 것이다. 거기서 오는 딜레마가 평온한 우리 삶에 가끔 잔잔한 풍파를 일으키듯이, 괴물 예술가의 창작물을 향한 딜레마도 아마 영원히 되풀이되며 예술사에 소환될 것이다.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리며 현재의 행복을 깎아내리지 않기, 그러면서도 희생자와 생존자를 충분히 기억하며 연대하기. 이 두 가지 임무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다. 삶과 예술을 복잡화하는 감각만 잃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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